'파비트라 대 여제' 2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2-21 10:32 | 조회 9265

 




황제와 맞선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결심이었다. 이스밀은 망설였다. 그는 파비트라와의 행복한 삶을 도박에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황녀로 태어난 파비트라가 이렇게 숨어서 촌 아낙네로 살다가 죽어도 좋은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카타니아가 은밀히 파비트라를 꼬드겼다. 마침내 이스밀이 파비트라에게 황도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파비트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스밀은 파비트라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반역을 결심했다. 그러나 실은 그날 파비트라가 한 대답은 ‘황도에 있는 어머니를 보러 가고 싶다’는 뜻이었을 뿐이었다.

 

이스밀은 먼저 신분을 감추고 용병 대장을 가장해 군대를 모았다. 거사가 실패할 경우 분노한 황제가 탑의 도시까지 파괴하는 일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밀은 탑의 도시에서 자금을 융통하긴 했지만 그 사실조차 감추고 아말 황자만을 전면에 내세웠다.

 

새로 즉위한 누로날 황제는 이듬해, 전례대로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황제가 탑의 도시로 행차할 때 도중에 습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계획은 들어맞았다. 얼굴을 감춘 이스밀이 이끄는 군대는 호위병들을 섬멸하고 황제와 그 일가를 사로잡았다. 누로날 황제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독약을 마셨으나 죽지는 않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소식을 들은 아말과 카타니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황도로 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스밀은 망설였다. 이렇게 된 이상 황위를 반드시 아말 황자에게 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번 거사에서 아말은 명목상의 수장일 뿐 스스로 한 일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훌륭한 황제가 될 자질도 없어 보였다. 아말은 거만해져서 이스밀을 용병 취급하며 무시했고, 파비트라마저 시골뜨기 주제에 나랏일에 끼어들 생각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누로날 황제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두 누이가 있었다. 황녀들은 결혼한 뒤 황위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이스밀은 그 중에서 일찌감치 남편을 잃고 신전에서 살아가고 있던 페리사 황녀의 의향을 떠보았다.

 

그 사이 아말과 카타니아는 의기양양하게 황도로 향했다. 이스밀은 참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말이 원로원에 나가 황제가 반역자들의 습격으로 죽었으니 자신이 그 뒤를 잇겠다고 선언하도록 기다렸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황도는 혼란에 빠졌다. 그 무렵 이스밀은 황도 근방에 이르러 천여 마리의 새를 잡아 그 발에 쪽지를 매어 황도로 날려 보냈다.

쪽지에는 누로날 황제를 습격한 반역자는 아말과 카타니아이며 황제는 살아 계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도의 귀족과 중신들은 과거 카타할 황자의 정변 때부터 둘로 갈려 있었다. 누로날이 죽었다면 남은 황자가 아말뿐인 것은 분명했지만, 아말이 황제가 된다면 카타할의 정변 때부터 카타니아과 아말을 박해해 온 다수파는 목을 장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날아든 쪽지의 내용은 그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았다. 반역자를 당장 처형하라는 요구와 모함하지 말고 증거를 대보라는 항변이 날을 세우는 가운데 이스밀은 페리사 황녀에게 호위를 붙여 황도로 들여보냈다.

 

페리사 황녀는 원로원으로 들어가 황제께서 자신에게 뒷일을 부탁했다고 눈물 섞인 연기를 하면서 아말과 카타니아의 목을 치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의식을 되찾은 누로날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눈은 떴되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황제는 반역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아말을 노려보았다.

 

아말은 처형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누가 자신을 몰락시켰는지 깨닫지 못했다. 황위가 본래 자기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스밀이 어떤 식으로 군대를 모으고 정변을 성공시켰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대가였다.

카타니아는 용케 달아났다. 그녀는 어쩌면 이스밀의 계획을 조금쯤 눈치 챘던 것인지도 몰랐다.

 

누로날 황제는 얼마 안 가 죽었고, 페리사 황녀가 여제로 등극했다. 여제는 곧 예순인 데다 일찍 홀로되어 자식이 없었다. 그 점이 이스밀의 협상 조건이었다.

이스밀이 페리사를 여제로 만들어주는 대신, 여제는 파비트라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속이었다.

 

이스밀은 파비트라의 권리를 찾아주고자 반역자가 되기로 했을 때, 동시에 파비트라를 여제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사를 먼저 내세운 것은 누로날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의 소생인 페리사는 쉽사리 지지를 받겠지만 파비트라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스밀의 계획은 잘 되어 가는 듯 보였다. 파비트라는 황도로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했고, 페리사 여제도 파비트라를 가르친다며 곁에 두었다. 이스밀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버릇대로 별다른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여제는 탄신잔치를 기화로 동생인 베레사 황녀의 아들 베난을 황도로 불렀다. 그러더니 몇 달 뒤 느닷없이 베난과 파비트라의 혼약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 조카인 베난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파비트라와 이스밀의 결혼 사실은 공식화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하게 된 과정이 과정이니만큼 황위 계승자로서 파비트라의 입지를 생각해서 일단 숨기기로 했던 터였다.

파비트라가 황제가 된 뒤에 다시 정식 결혼식을 올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여제가 먼저 그렇게 권유했었다.

 

혼약 발표 당시 이스밀은 탑의 도시에 가 있었다. 여제는 그것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뒤통수를 맞은 이스밀은 격분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남편이라고 나선다면 파비트라를 언젠가 여제로 만드는 일은 물거품이 될지도 몰랐다.

 

때마침 기하르 총독이 죽었다. 여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스밀을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거절한다면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승낙한다면 황도에 갈 기회는 없었다.

이스밀은 총독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비트라에게 물고기를 잡는 작살 끄트머리의 쇳조각을 보냈다.

 

작살 조각을 받은 파비트라는 이스밀의 뜻을 알아챘다. 기다려라. 오스테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때 파비트라는 세 번이나 탈출 시도를 하다가 붙잡혀 황궁에 갇혀 있었다. 파비트라는 대답 대신 결혼식 때 둘렀던 띠를 셋으로 잘라 두 조각을 보냈다. 띠를 받은 이스밀도 즉시 알아차렸다. 파비트라가 아이를 가졌음을.

 

파비트라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여제는 베난과의 혼인을 강행시켰다. 파비트라는 혼례까지는 받아들였지만 명목상의 부부임을 분명히 했다. 베난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어쨌든 황제만 되면 그만이었다.

페리사 여제가 모든 일을 서둘렀던 이유는 지병 때문이었다. 이듬해 병석에 누운 여제는 베난에게 황위를 양위했다.

만삭의 파비트라는 황후가 되었지만 이름뿐이지 사실상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얼마 후 파비트라는 아들을 낳았다.

 

황손의 탄생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베난 황제는 아이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어떻게 하면 파비트라와 이혼할지 그것만 궁리하고 있었다.

이혼이라면 파비트라도 대 찬성이었지만 선황제인 페리사가 황제 부부가 이혼한다면 양위를 철회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페리사는 비록 이스밀을 배신했지만, 파비트라의 자식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키고자 했다. 다만 이스밀의 자식으로는 곤란하고, 베난과 파비트라가 화해해서 새 아이를 낳아야 했지만 그럴 가망은 전혀 없었다.

파비트라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페리사의 내심을 알아차린 베난은 파비트라를 설득하는 대신 쉬운 길을 택했다. 그해 겨울, 선황제 페리사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공식적으로는 지병 악화라고 알려졌다.

그리고 며칠 뒤, 파비트라는 황궁을 떠났다. 아기와 호위무관 알키미를 비롯한 시종 몇 명만을 데리고. 베난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비트라가 종적을 감춘 뒤 베난은 한 해가 안 가 새 황후를 맞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대가 거셌다.

파비트라의 생사를 모르며 심지어 황손마저 데려간 마당에 새 황후를 맞기보다는 수색에 집중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파비트라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도 주장해 보았지만 파비트라는 이미 장례까지 치러졌다가 돌아온 전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베난 황제는 사라진 황손이 이스밀의 자식임을 밝혀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격이라 차마 하지 못했다.

 

중신들과 귀족들이 파비트라를 찾는 이유는 사라진 황손뿐만이 아니었다. 파비트라는 몇 년 동안 명목뿐인 황후 노릇을 했지만 행동거지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파비트라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딸이 조카뻘인 남편에게 무시당하면서 수척해진 모습으로 황후로서 위엄을 가지려고 버티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 베난 황제의 어머니인 베레사 황녀조차 죽었기에 파비트라는 샤미르 3세의 자식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샤미르 3세가 승하한 후 황자들 사이에서 죽고 죽이는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평화롭던 샤미르 3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어졌다. 그리고 파비트라는 그 시절의 마지막 상징 같은 존재였다. 어린 파비트라가 황제의 집무실에서 웃으며 뛰어다니던 그때야말로 최후의 황금기였다고 되뇌는 늙은 중신들이 많아졌다.

 

곧 있으면 누로날 선황제의 아들이 성년이 될 것이다. 그는 베난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페리사의 간택을 받아 황위를 이은 것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황족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의 피바람이 예상되는 지금 샤미르 3세의 마지막 핏줄인 파비트라를 황후 자리에서 내친다면 베난에게 무슨 정당성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베난에게 그런 사실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 황후를 결정해 발표했다. 황후가 두 명이 되는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샤미르 3세의 두 황후도 첫 황후가 죽은 뒤 후궁이 둘째 황후 자리에 올랐다.

 

베난이 국혼을 강행한 직후, 파비트라는 탑의 도시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탑의 도시를 피해 홀로 방랑해 왔다. 그 기간이 2년이었다. 아기는 어느새 훌쩍 자랐다. 그리고 파비트라는 오히려 건강해졌다.

이스밀이 달려 나왔을 때 남장을 하고 말을 비껴 탄 파비트라는 흡사 마적단의 일원 같은 모습이었지만 눈만은 반짝거렸다. 십여 명의 부하마저 뒤따르고 있어 정말 마적단이라고 해도 될 지경이었다.

 

이스밀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20년처럼 길었던 2년이, 얼굴을 맞대자 마치 이틀이었던 듯했다.

파비트라는 처음으로 이스밀에게 아들의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이름을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아기는 아명으로만 불리고 있었다. 이스밀은 아기에게 ‘이샤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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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 주댕이호호 @에노아 | 2레벨 | 사명의 초심자 | 하리하란
    사랑해요!!!!!!!!!!!!!!!!!!!!!!!!!!!!!!!!!!!!!!!!!!!!!!!!!!!!!!!!!!!!!!!!!!!!!!!!!!!!!!!!!!!!!!!!!!!!!!!!!!!!!!!!!!!!!!!!!!!!!!!!!!!!!!!!!!!!!!!!!!!!!!!!!!!!!!!!!!!!!!!!!!!!!!!!!!!!!!!!!!!!!!!!!!!!!!!!!!!!!!!!!!!!!!!!!!!!!
    2014-02-21 10:58
  • 동탁 @진 | 38레벨 | 용병 | 하리하란
    근데 이 내용 예전ㅇㄴ에 어디서 본듯한 내용인데.. 어디였지?
    공주가 숨어지냈던 내용 어서 본건데.. 옛날 아키홈피에서 본건가?
    2014-02-21 12:03
  • 에브니 @델피나드 | 50레벨 | 신비의 연주자 | 엘프
    아우~ 아까운 곳에서 끝났네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설정이 참 디테일한듯해요.
    웬만한 게임같았으면 -과거에 위대한 왕이 있었다. 그가 남긴 보물을 찾아라. 끝- 이정도였을텐데
    2014-02-21 13:35
  • 스릉한다 @키프로사 | 50레벨 | 첩자 | 하리하란
    사~랑~해~요~
    2014-02-21 17:02
  • 루나코코 @히라마칸드 | 50레벨 | 흑마법사 | 엘프
    으으으 뭔가 감질맛남 ㅠ 막 한꺼번에 읽어보고싶은 고런 느낌 ㅠ
    2014-02-21 17:23
  • 명석몽 @아란제브 | 50레벨 | 전쟁 인도자 | 페레
    오~ 좋아요 좋아!
    2014-02-21 17:49
  • 프레아드 @오키드나 | 52레벨 | 밤 노래꾼 | 엘프
    재밋다..
    2014-02-21 18:02
  • 비나 @키프로사 | 36레벨 | 신성 노래꾼 | 하리하란
    이샤마!!! 전하!!!!! 아명이 뭐에요!!!! 헠허ㅓㅋ!!!!! 파비트라가 대 여제로 불릴 무렵 이스밀은 없었으니 이샤마를 지키려고 강해진 건가요? 역시 어머니는 강하네요...
    2014-02-21 22:38
  • 하디드 @키프로사 | 36레벨 | 첩자 | 하리하란
    아 책사야 겟다
    2014-02-22 00:49
  • 미호 @타양 | 50레벨 | 숲의 방랑자 | 엘프
    영원한 여제 김연아 사랑합니다..
    2014-02-22 02:44
  • 한유미 @멜리사라 | 53레벨 | 전사 | 하리하란
    역시 아키.. 스토리 하나는 정말 좋음 짱좋음
    소설 안읽어보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2014-02-22 06:14
  • 어제내린비 @진 | 50레벨 | 추적자 | 하리하란
    책 제목이 뭐임?   책 사야겟쇼.
    2014-02-22 09:13
  • 운비님 @멜리사라 | 50레벨 | 흑마술사 | 페레
    ㅠㅠ...스토리 정말 좋다
    2014-02-22 10:01
  • 라라사 @이녹 | 52레벨 | 애도의 악사 | 하리하란
    이스밀 멋있어;ㅂ; 겁나 멋있어;ㅂ; 으아아아아아
    2014-02-22 12:22
  • 클레스언니섹시하네여 @오키드나 | 11레벨 | 음유 시인 | 엘프
    꺅~ 전민희언니~ 팬이에여~ T.T♥♥♥♥
    2014-02-22 20:32
  • 러브엘 @에페리움 | 50레벨 | 사제 | 엘프
    으잉 이거 책으로 나와 잇는건가요?
    2014-02-25 15:56
  • 사이키델릭 @진 | 50레벨 | 은둔자 | 하리하란
    스토리 좋음 오글오글 멜로 부분도 많이좋아진 전민희 작가. 과거보다 더 발전된 문단이나 집중과몰입이잘되는
    스토리들. 책자체는 매우 괜찮음. 세세한 조연의 스토리도 만들가능성이 무궁무진하여 정말 상상의 나래의 여백을 남겨주는  본의아닌 미덕도보여 좋았죠. 책은 전나무와 매, 그리고 상속자들입니다.
    게임에 질린분들이더라도 책을 읽어보시는것도 좋죠
    2014-02-25 21:53
  • 꾸르니무 @크라켄 | 55레벨 | 첩자 | 하리하란
    오...
    2015-03-05 1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