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4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3-07 10:10 | 조회 7709






황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파비트라 여제와 이스밀이 그토록 주의했는데도 몇 달이 흐르자 사람들은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문제는 황태자 이샤마였다. 아직 어린 이샤마는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이스밀을 아버지로 부르지 않도록 호칭은 겨우 단속해 놓았지만 자연스러운 호감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아이는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비트라는 이샤마가 이스밀과 만나지 못하도록 떼어 놓아야 했다. 이스밀도 동의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일이라 한들 고통스럽지 않을 순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샤마가 유배 중인 베난을 방문하도록 하기도 했다. 베난에게 미리 경고해 두었기에 넌 내 아들이 아니라는 둥 하는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아이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파비트라와 이스밀은 점점 더 만남을 줄였다. 한 달에 몇 번, 그것도 스쳐가며 몇 마디 나누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수천 개의 눈이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신들은 파비트라 여제와 결혼할 후보로 샤미르 3세의 조카, 샤미르 4세의 외손자 등을 골라 왔지만 파비트라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제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어야 했다.

그 무렵 도망쳤던 다할이 돌아오자 중신들은 반색하며 다할을 첫째 후보로 올렸다. 다할도 물론 찬성이었다. 분위기는 멋대로 무르익어 갔다.

 

결국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비트라는 비록 유배중이긴 하나 자신의 남편은 아직까지도 베난이며, 베난이 죽을 때까지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베난은 두 황후를 두려 했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파비트라가 황제가 된 이래 처음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결혼 이야기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다할은 포기하지 않고 틈을 엿보았다. 예전 페리사 선황제 때부터 파비트라를 보아 온 다할은 파비트라와 베난 사이에 한 번도 애틋한 사랑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파비트라가 저렇게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심을 품고 바라보는 다할의 눈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스밀은 아예 황도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 류이진이 첩자로 쓰는 시종들을 통해 편지만 드문드문 주고받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무렵 비파 항구에서 폭동이 일어나 총독이 피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파비트라의 치세에 첫 번째로 닥친 큰 문제였다.

 

진압을 두려워한 반란군은 죽은 총독의 학정을 적은 편지를 보내며 황제의 특사를 바랐다. 그러나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면 곤란했기에 그들의 요구가 옳든 그르든 그대로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때 류이진은 이스밀에게 진압군 총대장이 되라고 조언했다. 제국에 충직한 모습을 보여 중신들의 의심을 벗자는 것이었다. 이스밀도 이렇게 지낼 바엔 잠시 떠나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여제 앞으로 나아가 원정을 자원했다. 파비트라도 입술을 깨물며 윤허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파 항구에 이르러 첫 전투가 벌어졌다. 평민들이 뭉쳐 급조한 군대이니 오합지졸이겠거니 여겼던 이스밀은 반란군과 부딪쳐보고 조금 놀랐다. 비록 훈련이 부족한 군대였지만 전술 운용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기도 드높았다. 이는 상대 군대에 범상치 않은 지휘관이 있음을 뜻했다.

 

류이진의 첩자들이 항구 근방의 정보를 모아왔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어부에 불과했지만 그를 돕고 있는 자가 은퇴한 장군 메레디스라고 했다.

메레디스는 샤미르 3세가 아끼던 군인으로 이니스테르와의 북방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다. 그러나 샤미르 3세가 죽은 후 황자들이 황좌를 놓고 피 튀기는 다툼을 벌이자 환멸을 느끼고 고향인 비파 항구로 돌아가 버렸던 인물이었다.

 

류이진은 메레디스가 용장이며 전술에도 능하지만 얕은 속임수를 경멸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에 휘말리기 쉬운 성미라고 분석했다. 또한 황도를 적으로 돌릴 만큼의 동기가 약하며 샤미르 3세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류이진은 비파 항구 주위의 촌락들에 첩자를 풀어 소문을 퍼뜨렸다. 새로 즉위한 파비트라 여제가 아버지의 충신이던 메레디스 장군을 황도로 부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먼저 깔고, 장군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어 한다든가, 이미 답신을 보냈다든가, 장군이 거절했지만 마음이 흔들렸다든가, 이 문제로 장군과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냉전을 보이고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단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한 가지 소문이었다면 강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일이었으나 소문의 내용이 복잡했기에 해명을 하려 해도 어디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가 모호했다. 그리고 구구절절 해명하려면 무척 구차한 느낌을 줄 것이기에 류이진은 메레디스가 아무 해명도 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류이진이 생각한 대로였다. 소문이 퍼지면서 살이 붙어 마침내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메레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밀은 크게 승리했다. 반란군의 규율은 흐트러져 있었다. 누구라도 내 편이 아닌 듯한 지휘관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 마련이었다. 지금쯤 메레디스 장군도 반란군에서 서서히 마음이 떠나고 있을 터였다.

 

류이진은 그 즈음을 노려 메레디스에게 파비트라 여제의 이름으로 밀서를 보내자고 했다. 이스밀이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사칭할 수 없다고 하자 류이진은 ‘이스밀 경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유일한 장점이 이건데 뭘 그리 딱딱하게 구느냐’며 낄낄 웃었다.

 

밀서를 받은 메레디스 장군은 이스밀과 만나고 싶다고 답했다. 이렇게 쉽사리 포섭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뜻밖이기도 했다. 은밀하게 마련한 회담 자리에 나타난 메레디스는 이스밀을 한참 동안 뜯어보더니 ‘샤미르 3세 폐하께서 막내사위는 참 잘 고르셨다’고 말했다.

당황한 이스밀이 그건 다 지난 일이라고 강변했지만 메레디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이샤마 황태자가 이스밀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메레디스는 일찌감치 은퇴하고 무료하게 지냈기에 오히려 변방의 움직임을 더 잘 느껴왔다. 이스밀이 1차로 아말 황자를 내세워 모았던 군대에서 용병대장을 가장했던 이스밀이 주동자임을 일찌감치 알았을 정도였다.

2차 거사를 위한 군대는 멀리 아므르타에서 키웠던지라 알지 못했지만, 파비트라가 황제가 된 것을 보고 추리로 알았다고 했다. 이스밀이 만든 일임을.

 

메레디스는 이스밀이 과거 어린 파비트라를 납치했을 때까지만 해도 황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파비트라를 데려간 사람이 이스밀임을 확신했고, 이스밀이 파비트라를 위해 감옥살이까지 감수하는 것을 보고서 황녀를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메레디스는 샤미르 3세의 충신이었던 만큼 황제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어린 황녀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메레디스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이스밀도 더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메레디스는 이스밀이 왜 파비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하는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메레디스는 이어 비파 항구의 반란 원인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황제의 친서를 직접 써도 될 정도라면, 하고 일침을 가하며 황제에게 주청해 반란군의 협상 조건을 일정 정도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스밀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라고 묻자 메레디스는 ‘아니오. 경께서는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인다는 선택을 할 수 있소’라고 답했다.

 

메레디스의 말이 맞았다. 이스밀의 비밀을 이용해 비파 항구의 반란군을 구하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메레디스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이스밀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번 회담은 장군께서 이겼소.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적은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거나, 한 편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죽이는 쪽이 더 안전했지만 이스밀은 메레디스의 인품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류이진이 조건을 내놓았다.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메레디스가 황도로 가서 여제를 보필해 달라는 것이었다.

메레디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대신 이스밀이 비파 항구의 총독이 되어 달라고 요구했다.

 

류이진은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베난이 갑자기 죽지 않는 한 파비트라가 다할과 결혼할 일은 없으니 시간을 두고 파비트라의 황권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파비트라 여제는 그들의 뜻을 모두 들어주었다. 첫 번째 반란 진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메레디스는 황도로 가고, 이스밀은 비파 항구에 남았다.

 

몇 년이 흘러갔다. 파비트라는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수행했다. 샤미르 3세를 오래 모신 메레디스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스밀 또한 비파 항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황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비파 항구의 문물이며 풍습은 제국의 중심부와 많이 달랐다. 그는 최선을 다해 비파 항구를 이해하고 보살피려 했다. 그렇게 일에 파묻혀 옛 일을 잊어보려 했다. 수 년 동안 그러고 있자니 파비트라와 함께했던 나날은 꿈이었던 듯하기도 했다.

 

그 사이 이샤마 황태자는 소년으로 자랐다. 어느 날, 파비트라가 문득 이스밀의 이야기를 꺼내보니 이샤마는 이스밀이 누구인지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파비트라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황권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어떻게든 가족을 다시 합치고 싶었다.

 

파비트라는 옛 황제의 전통을 살려 제국의 대도시들을 순방하겠노라고 했다. 비파 항구는 세 번째 순방지였다.

여제의 어가가 비파 항구 근처에 이르자 총독인 이스밀이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파비트라는 어가의 휘장을 젖히라고 명했다. 몇 년 만에 마주본 두 사람은 양쪽 다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파비트라와 이스밀은 웃지도 못한 채 의례적인 치하와 겸양을 주고받았지만 열렬한 시선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류이진이 보다 못해 헛기침 소리를 내고서야 이스밀은 눈을 내리깔며 어가를 도시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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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뚜쉬뚜쉬 @루키우스 | 52레벨 | 흑마술사 | 엘프
    류이진이 제대로 지능캐네요 ㅋㅋㅋ 맘에 쏙 듭니다
    2014-03-07 16:01
  • 라라사 @이녹 | 52레벨 | 애도의 악사 | 하리하란
    해바라기 커플;ㅂ;엉엉 니네들 빨리 결혼해라;ㅂ;
    2014-03-07 16:13
  • Icart @에페리움 | 42레벨 | 포식자 | 누이안
    류이진 재밌고도 좋은 캐릭터 ㅋㅋㅋㅋㅋㅋㅋㅋ
    2014-03-07 17:50
  • 명석몽 @아란제브 | 50레벨 | 전쟁 인도자 | 페레
    류이진. 비파에 엔피시로 남아있나.
    2014-03-07 18:11
  • 비나 @키프로사 | 36레벨 | 신성 노래꾼 | 하리하란
    이걸로 네 장군 모두 등장했네요. 근데 류이진ㅋㅋㅋㅋㅋㅋ이샤마가 진짜 황녀였으면 위험할 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4-03-09 18:25
  • 에브니 @델피나드 | 50레벨 | 신비의 연주자 | 엘프
    좋은 인재가 많군요~
    2014-03-09 21:16
  • 은담 @에안나 | 55레벨 | 사제 | 누이안
    ㅠㅠ 티도못내고...
    2014-03-15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