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의 기록
'파비트라 대 여제' 5화. 신대륙의 인물들
2014-03-14 10:13 조회 7765
비파 항구의 총독 관저에서 황제를 위한 잔치가 열렸다. 그날 파비트라는 예전과 달리 이스밀을 가까이 앉게 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태자가 어떻게 자라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너무나 스스럼없는 태도여서 이스밀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영문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께서 술을 좀 드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윽고 침소로 들어간 파비트라는 밤이 깊어질 무렵 은밀한 신호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이진이 직접 시종의 옷을 가지고 왔다. 옷을 바꾸어 입자 류이진이 방 한쪽의 나무 패널을 걷어내고는 ‘폐하, 송구하오나 신발을 벗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패널 뒤로는 한 명이 지나가기에도 좁아 보이는 긴 통로가 보였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통로의 한쪽은 나무로 된 얇은 벽이었는데 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방들을 차례로 거치며 이어졌다. 본래 비밀 통로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밀담을 엿듣기 위한 용도였다. 이런 곳을 소리 없이 지나가려니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미로처럼 이어진 통로를 따라가 어느 외딴 방에 이르렀다. 류이진이 절을 하며 들어가시라고 했다. 파비트라가 혼자 안으로 들어가자 이스밀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비트라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을 만날 땐 늘 맨발이네.’
이스밀도 웃었다. ‘황도는 물고기를 잡기에 좋던가?’
밤은 짧았다. 새벽녘이 되자 류이진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밤새 그 앞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파비트라는 떠나기 전에 말했다.
“우리도 이제 슬슬 결혼이란 걸 해보면 어떨까?”
“저 오스테라의 바닷가에서부터, 그대는 이미 내 아내였지 않나.”
파비트라는 ‘아내 노릇은 영 못한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방을 나섰다. 이스밀은 아직도 우려하는 듯했다. 침소로 돌아가면서 파비트라는 내일 이스밀에게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잘해냈는지 설명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스밀은 너무 변방에 있어 자세히 모르는 것이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파비트라는 자신이 새 황제로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고 믿고 있었다.
이튿날은 비파 항구의 호족인 바르토크가 황제를 안내해 근방의 마을들을 돌아보기로 되어 있었다. 이스밀이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라면 호족들은 여전히 그 지역의 실세들이었다. 일생 한 번 겪기도 어려운 황제의 거둥이니 한 번쯤 모실 기회를 주어야 뒤탈이 없었다.
파비트라는 바르토크와 함께 비파 항구 곳곳을 돌아보고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바닷가에 이르렀다. 바르토크는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정자 망루를 가리키며 마침 해질녘인데 저곳에 올라가면 근사한 낙조를 볼 수 있으나 계단이 가파르므로 오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파비트라는 예전에 오스테라에 살았던 기억 때문에 바다를 좋아했으나 내륙의 황도에서 지내게 된 후로 가볼 기회가 없었다. 이스밀과 가장 행복하던 시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닷가에서 낙조를 받으며 놀던 기억이 떠오른 파비트라는 흔쾌히 올라가보겠다고 했다.
계단은 과연 좁고 험했다. 늙은 바르토크는 물론이고 시종들이 하나 둘 처지기 시작하자 파비트라는 오히려 그들을 앞질러갔다. 파비트라가 정자에 이르렀을 때 황제보다 먼저 올라온 시종은 호위무관 네 명뿐이었다. 후열에 물러나 있던 이스밀이 소식을 듣고 곧 뒤따라 올라왔다.
파비트라와 이스밀은 나란히 정자 가장자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행복감은 아주 잠시였다. 해를 정면으로 보아 시력이 흐릿해졌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음이 울렸다. 바다 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온다 싶었을 때 파비트라는 갑자기 뒤로 넘어졌다. 이스밀이 그녀를 넘어뜨리며 덮쳐누른 것이었다.
파비트라는 경악한 표정으로 이스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가 이스밀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좌우를 보니 수십 개의 화살이 기둥에 꽂히거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시종들 중 세 명이 쓰러졌고 나머지는 바닥을 기어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반역이다!’
호위병과 시종들이 뛰어올라왔다. 파비트라는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옷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 언저리가 피범벅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스밀의 피였다. 등을 꿰뚫은 화살의 촉이 이스밀의 가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스밀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여기서 계속 기다릴 테니, 가라’고 말하고는 숨이 끊어졌다.
파비트라는 석상처럼 굳어져서 이스밀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계단 쪽에서 류이진이 뛰어올라왔다. 그는 쓰러진 이스밀을 보더니 눈이 커졌지만 재빨리 생사를 확인하고는 파비트라에게 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불경을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파비트라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바르토크가 반역했습니다. 건너편 절벽에 미리 궁수를 매복시켰던 모양입니다. 계단 아래쪽은 반역자들이 포위했습니다. 폐하의 군대는 그 뒤에 있어서 당장 도움이 안 됩니다. 일단 숲으로 피신하셔야 합니다. 걸을 수 있으십니까?”
파비트라가 대답 없이 이스밀만 내려다보고 있자 류이진은 이를 악물더니 파비트라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파비트라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스밀은…….’
류이진이 답했다. ‘황송하오나 지금은 모실 수가 없습니다.’
살아남은 호위무관은 세 명에 불과했다. 알키미가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는 이샤마 황태자를 호위하기 위해 황도에 남았다. 황제가 황도를 비울 때는 황태자의 안전도 중요한지라 파비트라가 그렇게 명령했었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더 머물 시간이 없었다. 숲으로 내려가는 길은 키를 넘는 낭떠러지였다. 류이진이 부축하려 했지만 파비트라가 뿌리쳤다. 파비트라는 이스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그의 허리에서 검을 풀어 움켜쥐더니 거추장스러운 긴 치마의 아랫단을 찢어냈다. 그리고 혼자 숲으로 뛰어내렸다. 무관들은 물론 류이진도 깜짝 놀랐다.
그들이 숲으로 나아가는 동안 불길이 정자와 죽은 자들을 차례로 삼켰다.
아래쪽 마을로 가서 호위병들과 만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이미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파비트라는 쉬워 보이는 해답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바다로 내려갈 길을 찾으라고 명했다.
험한 바윗길이 이어졌으나 파비트라의 움직임에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적들이 나타나자 심지어 검을 뽑아 싸웠는데 상상도 못하던 실력인지라 무관들이 크게 당황했다. 그들 모두는 여제가 검을 잡을 줄 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바닷가의 어부들은 뜻밖에도 황제를 도우려 했다. 비파 항구 전체가 반역 도당은 아닌 듯했다. 젊은 어부 한 사람이 자신은 가족이 없으니 뒤탈이 없다면서 자원해서 황제 일행을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 며칠 동안 항해한 끝에 마하데비에 다다르자 파비트라는 어부에게 끼고 있던 팔찌와 ‘아게우스’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일단 탑의 도시로 가기로 했다. 파비트라도, 류이진도 의견이 같았다. 그곳으로 가면 이스밀의 친구이자 충복인 나디르가 있었다. 탑의 도시 출신인 이스밀이 비파 항구의 총독이 되자 파비트라는 대신 나디르를 탑의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했었다.
나디르의 휘하 군대는 정예군으로 유명했다. 그들과 합류한다면 비파 항구의 반역자들쯤은 쉽사리 진압할 수 있을 듯했다.
반역자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불분명했다. 예전에 이스밀이 진압했던 반란은 알고 보니 비파 항구의 호족들이 뒷조종한 것이었고, 그들이 자나 깨나 원하는 것은 독립이었다. 그러나 독립을 원한다고 황제와 총독을 암살하는 것은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이진은 다할의 음모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파비트라는 다할이 그렇게까지 야심차고 행동력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둘은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탑의 도시에 가보면 다 알게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남하하던 도중 들른 쉼터에서 한 여행자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탑의 도시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상대 군대가 누구냐고 묻자 더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오스테라 군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파비트라 일행은 그날 더 나아가지 못하고 쉼터에 머물렀다. 밤이 깊었을 무렵 파비트라가 류이진을 불렀다.
황제가 머물 곳이라고는 믿기 힘든 누추한 방에서 파비트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류이진이 맞은편에 앉자 파비트라가 말했다.
“난 경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 이제 짐을 계속 따라야 할지, 그만 버리고 떠나는 편이 현명할지 고민하고 있겠지. 이해해. 경이 처음에 섬기고자 찾아왔던 주군은 이스밀이었지 나는 아니었으니까.”
류이진은 처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눈을 내리깐 채 듣기만 했다. 이스밀은 처음 류이진을 받아들일 때부터 그의 충성심에 대단한 기대를 걸지 않았다. 파비트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류이진은 생각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 이스밀을 보필해 왔다. 처음에 의심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치 않는 법이었다. 파비트라는 이스밀이 죽은 후로 줄곧 류이진의 태도를 살펴 왔다. 현재 파비트라가 유일하게 의지할 상대인 류이진이 언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지, 시시각각 재고 있었다.
이윽고 류이진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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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쉬뚜쉬
@루키우스
52레벨
흑마술사
엘프
갑자기 반역에 급전개 ㄷㄷ 이스밀찡이 이리 죽다니....ㅠㅠ2014-03-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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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삐약이
@히라마칸드
53레벨
추적자
누이안
흑.. 이스밀 ㅠ_ㅠ2014-03-1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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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짱짱맨
@키프로사
52레벨
사제
누이안
전민희작가글의법칙2014-03-14 15:25
1.커플이있다면누군가를죽인다(여기서이스밀처럼....)
2.무슨일이있던주인공빼고거의죽는다......ㅜㅜ -
에브니
@델피나드
50레벨
신비의 연주자
엘프
아니 이런... 활쟁이들이...2014-03-1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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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사
@이녹
53레벨
애도의 악사
하리하란
아이고.. 아이고... 왜 훈남이 죽는가아아아..2014-03-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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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엔치킨
@이녹
21레벨
무도가
엘프
이스밀이죽었어ㅜㅜ 오늘도커플브레이커 전민희 작가님은 건재하십니다ㅜ...2014-03-14 23:33
이스밀 벤츠남인데ㅜㅜ -
은담
@에안나
55레벨
사제
누이안
ㅜㅜ 아 이스밀 ㅠㅠㅠ2014-03-15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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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니엘
@올로
54레벨
그림자 검
페레
ㅠㅠ ... 전무후무 커플브레이커 전민희 작가님... 오늘도 이렇게...2014-03-15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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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엘
@에페리움
50레벨
사제
엘프
아닙니다. 여러분~ 진짜 커플브레이커는 나이트런 작가입니다. 전우주적인 커플브레이킹을 재난화시켰지요.2014-03-15 14:20
그나저나 나 나런 이후로 커플브레이커 작가 드럽게 시러하는데 -_- 이 작가도 그럴 줄이야.. -
러브엘
@에페리움
50레벨
사제
엘프
이스밀이 지금에 파비트라 여제 옆에 안 보인다고 누가 이야기 하길래, 죽을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반란으로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이제! 복수가 시작되는 것인가!!!2014-03-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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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엘
@에페리움
50레벨
사제
엘프
으으으아악!!! 루키우스의 기록에 처음 있었던 연대기표를 보고 여제에 미래를 알아버렸어~~~ 으으으으아아악!!!2014-03-15 14:32
안돼~~~ ㅠ.ㅠ 앞으로 연재를 볼 이유가 없어졌다... 아아..
이젠 진이 왜 그렇게 파멸과 폭력만 일삼는 성격으로 변해버리는 건지 알고 싶네요. -
폭주다랑어
@키프로사
50레벨
그림자 검
누이안
저렇게 파비트라와 이스밀에게 헌신하던 류이진 메레디스 알키미 나디르2014-03-16 00:15
네장군이 왜 갈라서게되서 제국을 분열시켯는지궁금한일이다 -
명석몽
@아란제브
50레벨
전쟁 인도자
페레
이스밀이 죽다니.2014-03-1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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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
@아란제브
51레벨
교란꾼
엘프
커플 브레이커 ㅠㅠㅠ2014-04-2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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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ng
@루키우스
53레벨
자객
하리하란
여행자는아마루키우스일듯2014-08-0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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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니무
@크라켄
55레벨
첩자
하리하란
헐...2015-03-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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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모험
@크라켄
10레벨
사제
누이안
헐!2015-04-16 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