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의 기록
'파비트라 대 여제' 7화. 신대륙의 인물들
2014-04-02 09:00 조회 7631알키미는 순간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이제 와서 숨겨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다. 황제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같다. 더구나 아들에게는 마땅히 아버지의 죽음을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파비트라가 내린 명이 떠올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샤마의 아버지는 베난이어야 하며, 누구보다도 이샤마가 그렇게 알아야 한다고 했다. 황위가 걸린 일이었다. 이샤마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파비트라와 이스밀이 치른 희생이 얼마이던가? 이제 와서 그것을 무위로 돌릴 순 없었다.
알키미는 조용히 답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샤마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캐묻지 않았다. 그날 새벽, 두 사람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황도를 탈출했다. 수 년 전에 파비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멀어져가는 황도의 탑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이샤마가 눈물을 보이자 알키미가 말했다.
“심려를 거두십시오, 폐하. 세상 사람들이 여제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던 때가 몇 번이었습니까? 그러나 결국 어찌 되었습니까? 여제는 신들께서 택하고 담금질한 이 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이대로 끝날 리가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는 없었다. 알키미의 신앙 고백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알키미는 신들을 믿듯 자신이 섬겨 온 여제를 믿었다.
이샤마가 그 말을 믿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제국의 거친 황야에 몸을 감추었다.
이샤마 황제가 사라졌음이 알려지자 황도의 귀족들은 드디어 다할을 황제로 추대하자고 했다. 다할은 도리를 운운하며 한두 번 거절하는 척 했다. 속으로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이샤마가 알아서 사라져 주는 바람에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자신 외에 황제가 될 자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다린 자가 승리자였다.
세 번째로 중신들과 귀족 백여 명이 찾아가 엎드려 청하자 다할은 못이기는 체 일어나 황궁으로 행차했다. 그런데 막 황궁에 도착했을 때, 급히 달려온 사자가 소식을 알렸다. 자칭 ‘제국 수호군’이라는 자들에게 비파 항구가 함락되었다고.
그리고 그곳에 파비트라 여제의 깃발이 내걸렸노라고.
십 수 일 전, 제국 수호군은 교역선으로 가장한 아게우스의 백군을 먼저 비파 항구의 부둣가로 숨어들게 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류이진이 잘 아는 뒷길을 통해 청군, 녹군, 흑군을 총독부로 들여보냈다. 이스밀은 총독으로 재임 당시 쇠락한 부둣가를 새롭게 수리했는데 그때의 책임자가 류이진이었다.
비밀 통로는 총독부로 이어졌다. 총독부 안이야말로 류이진이 손바닥 보듯 하는 비밀 통로의 거미줄이었다. 제국 수호군은 순식간에 보초들을 제압하고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상당수의 관리들은 과거 이스밀에게 은혜를 입어온 터라 쉽게 투항했다. 또한 그들은 류이진이 안 될 것 같은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사이 케사드의 홍군은 마적다운 방식으로 수호관을 돌파해 바르토크의 저택을 급습했다. 파비트라는 홍군의 일원이 되어 옛날처럼 함께 말을 달렸다. 끌려나온 바르토크는 당당하게 ‘마적 따위는 내 목을 베어갈지언정 굴욕을 주지는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복면을 벗은 상대가 파비트라임을 알아보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파비트라는 왜 이런 일을 벌였느냐고 물었다. 바르토크는 비파 항구를 제국에서 독립시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파비트라가 말했다.
“너희의 독립을 대가로 짐을 죽이라고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를 모살한 대역 죄인이 될 뿐이니까. 너희에게 사면을 약속한 자는 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려는 자일 것이다. 황제가 아니고서는 대역 죄인을 사면해 줄 수가 없으니까. 그자가 누구냐?”
바르토크는 한 가지를 약속해 주면 대답하겠다고 했다. 파비트라는 너희 일가를 살려달라는 말이라면 입 밖에 내지도 말라고 못박았다. 바르토크도 그런 용서를 바라지는 않았다. 대신 ‘저희 일가를 멸하시되 비파 항구는 보전해 주십시오. 제가 폐하를 칠 때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파비트라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파비트라 대신 황제가 되려는 자는 물론 다할이었다. 그러나 바르토크에게 독립을 약속한 자는 카타니아 황녀였다. 카타니아는 비파 항구에만 독립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오스테라도 오랫동안 독립을 원했다.
카타니아는 오랫동안 오스테라에 머물며 권력자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 후 다할과 접촉해 제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반란을 일으켜 파비트라를 죽이면 다할은 황도를, 카타니아는 탑의 도시를 차지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계획은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나눠주고 남은 부분을 삼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제국은 분배할 전리품에 불과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파비트라는 직접 바르토크를 처단했다. 그리고 바르토크의 일가붙이 또한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텅 빈 저택에 불을 지른 홍군은 바람처럼 총독부로 합류했다. 바르토크의 저택은 불덩이로 변해 밤새도록 타올랐다.
아침이 되자 류이진은 총독부에 여제의 깃발을 내건 뒤 조서를 내려 반역자 바르토크가 멸문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비파 항구는 대역죄를 지었지만 흰옷을 입고 총독부 문 앞에 와서 절을 하는 자들은 뉘우치는 것으로 알고 여제께서 사면할 것이라고 포고했다.
곧 총독부 문 앞은 흰 옷을 입은 자들로 가득 찼다. 실은 반신반의하며 밑져야 본전이라는 기분으로 나온 자가 많았지만 각자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모두 흰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이 남기 마련이었다. 흰 옷을 입고 나온 어마어마한 인파를 본 그들은 감히 다른 생각을 먹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투항시킨 셈이었다.
그날, 비파 항구는 파비트라 여제가 처음으로 정복한 땅이 되었다. 조신들의 하례를 받은 파비트라는 가장 먼저 이스밀이 죽었던 정자로 갔다. 정자는 다 타버렸으니 이스밀도 그 속에서 화장된 셈이었다.
여제가 정자로 오르던 계단을 바라보고 있는데 늙은 농부가 찾아와 이스밀이 끼고 있던 총독의 반지를 여제에게 바쳤다. 타버린 정자의 폐허에서 발견해 지금껏 간직해 왔다고 했다. 황금으로 된 반지는 가난한 농부가 평생 번 돈보다도 더 비싼 것이었지만 그는 반지를 팔아버리지 않았다.
과거 이스밀 총독은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소작료의 상한선을 정하고 오랫동안 소작 부치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지 않는 법을 만들었다. 농부는 그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비파 항구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가져 본 과분한 총독을 잃었으니 다시는 그런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으리라며 울먹였다.
반지를 받아든 파비트라는 한참 생각한 끝에 ‘귀하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날 밤 파비트라는 류이진과 마주한 자리에서 말했다. 솔직히 다시 비파 항구를 빼앗으면 모조리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고. 지금도 이 땅에는 치가 떨린다고.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스밀은 본의 아니게 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고장의 총독이 되었지만 훌륭히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배신당하고 말았기에 지금까지는 이스밀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파비트라와 류이진이 무모한 작전으로 비파 항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절반 이상 이스밀의 힘이었다. 이스밀이 수 년 동안 이 자부심 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배신당했을지언정 이스밀의 노력은 사람들의 마음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스밀도 비파 항구를 사랑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스밀에게 이곳은 사실상 유배지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떠나와야만 했기에 억지로 택한 땅이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 마치,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과 일생 마주칠 일이 없는 백성들로 이뤄진 제국을 보살펴야 하는 황제처럼.
파비트라는 황제였지만 자신이 이 넓은 제국을 구석구석 굽어 살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은 그리 깊이 해보지 못했다. 황녀로 태어났고, 이스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황제로 만들려고 노력했기에 자연히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게 힘들여 얻은 것이니까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국의 입장에서는 누가 황제인가가 중요했을까? 최근 수십 년 동안 제국은 몇 번이나 황제를 갈아치웠다. 변방에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바뀌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비파 항구의 사람들에게 파비트라는 누로날 황제나 페리사 황제, 베난 황제와 다른 존재였을까? 총독이 한 농부의 삶을 바꾸었듯, 황제는 그런 존재일 수 없을까?
파비트라는 처음으로 제국을 인지했다. 황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꿈틀대며 살아가고 있는 그 제국의 보호자였다. 황위는 누군가가 손에 쥐어 준 달콤한 과자가 아니라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제국이 파비트라를 배신하더라도 파비트라는 그들에게 복수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신하게 된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황제 노릇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파비트라의 말을 듣고 있던 류이진이 말했다.
“그런데 폐하. 이제 석 달이 다 되었군요.”
파비트라는 퍼뜩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이제 떠나고 싶은가? 미리 말해두지만 경은 정한 기간 동안 최선을 다했어. 짐은 깊이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면죄부를 위한 유예기간에 불과했던 석 달이었지만 그렇다고만 보기에 류이진은 지나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목숨을 내던지는 거나 다름없는 작전을 이끌었던 것이다. 파비트라가 다시 물었다.
“이렇게 성공하긴 했지만 사실 이번 탈환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짐이 이 계획을 세웠을 때 경은 반대할 수도 있었어. 석 달 뒤에 떠날 거라면 안전한 곳에 은신하자며 시간을 끄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류이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신경질을 부렸다.
“폐하께서 소신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줄은 잘 압니다만, 그런데 그건 이스밀 공의 영향입니까? 하여튼 소신은 알키미 경처럼 주군을 위해 섶을 지고 불에라도 뛰어드는 신하는 아니지만, 석 달간 충성하기로 하고서 넉 달째의 목숨을 걱정할 정도의 소인배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재계약을 기대해도 되겠는가?”
“어제까지는 그랬는데 지금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이제부터가 더 가시밭길일 것 같아 망설여지는군요.”
그렇게 말했지만 류이진은 파비트라의 곁에 남았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파비트라는 이미 황제였기에 과거 이스밀처럼 허를 찌르는 작전은 쓸 수 없었다. 반역도당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이제부터 황제가 건재함을 알려 그들이 스스로 정체를 폭로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뒤 제국의 백성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 파비트라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이스밀이 비파 항구를 보살폈듯 자신이 제국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류이진은 달랐다. 그는 여제와 달리 백성의 마음은 기교로 사로잡고 책략으로 유지한다고 믿었다. 그 둘은 류이진의 전문 분야였다.
이스밀의 죽음은 류이진에게 슬픔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치욕이었다. 자신이 택한 주군을 향해 다가오는 계략을 깨닫지 못하다니.
두 번째로 택한 주군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다시는 마음을 놓지 않을 것이다. 파비트라 여제가 전 대륙을 발아래 둘 때까지.
'루키우스의 기록'은 매주 수요일 주 1회 연재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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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쉬뚜쉬
@루키우스
52레벨
흑마술사
엘프
류이진 : 갱신시 보험ㄹ.. 아니 계약금이 인상될 수 있습니다 고갱님2014-04-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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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니
@델피나드
50레벨
황혼의 지배자
엘프
계약금 인상분만큼 야근+특근을 지시합니다~2014-04-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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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앙끄앙
@키프로사
32레벨
사제
누이안
나름 스토리가 탄탄하네2014-04-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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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몽
@아란제브
50레벨
전쟁 인도자
페레
류이진을 게임내 어디서 봤더라... 본것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2014-04-0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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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를이기니
@안델프
50레벨
흑마술사
하리하란
역시 재밋어 +.+2014-04-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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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광쾅쾅
@루키우스
50레벨
포식자
페레
또 2주 기다려야되네 ㅜㅜ2014-04-0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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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매니아
@메어
52레벨
길잡이
페레
하리하랄라야에서 류이진 원혼 잡았었죠2014-04-0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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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엘
@크라켄
50레벨
사제
엘프
잼써~2015-02-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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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엘
@크라켄
50레벨
사제
엘프
엥 하리하랄라야에 류이진 원혼이 있었나요? 헐.. 그럼 류이진도 억울하게 죽는???2015-02-10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