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트라 대 여제' 20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10-22 09:19 | 조회 15395







페레 원정을 이끌도록 결정된 후, 이샤마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간 그에게는 파비트라가 모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차마 어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시작은 오래 전이었다. 알키미와 함께 페레 부락에서 지내다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무렵부터 이샤마는 황위 계승에 관심이 없어졌다. 어린 나이부터 보고 겪은 정치가 하필 너무 가혹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파비트라도 견디기 힘들었던 시절인데 어린 이샤마에게는 어떠했겠는가.

성품이 온화한 이샤마는 평화를 갈망했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 수 없다면 마음의 평화라도 얻고자 했다. 그는 점차 지금이 아닌 다른 시대, 태평성대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좀 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황태자의 열정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처럼 까마득한 옛날, 모든 문명이 꽃피었다던 원대륙 시절로 향했다.

 

원대륙, 즉 대이주 이전의 세계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문화며 학문, 마법이 모두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것이었다는 기록만은 공통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유산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황태자의 권한으로 황궁 서고의 비밀 자료에 접근한 이샤마는 오랫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정보를 속속 발견했다. 무엇보다 신비한 ‘정원’과 최초의 원정대에 대해 읽은 그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세계의 수도로 불린 위대한 도시의 도서관, 자유롭게 학문을 연마하다가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 세계의 중심으로 떠난 그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황태자는 정원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이미 갈 수 없는 땅이었고, 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정원에서 돌아온 신들이 지배한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바로잡으려 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놀라웠다. 자신이 저 위대한 시대에 태어나 그 사건들을 목격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즈음 이샤마는 제국에서 섬기던 신들에 대한 신앙심을 잃었다. 그가 원하는 비밀은 정원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샤마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신성한 여인은 이샤마가 가장 궁금해 하던 것, 즉 제국이 섬기는 이런 저런 신들이 아닌 세상을 창조한 ‘어머니’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 그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문제의 ‘정원’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샤마가 살아가는 동안은 그 정원으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으리라고 했다. 이샤마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너는 정원에 들어가지 못할 운명이지만, 네 후손들은 그곳에 갈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들어가려면 많은 것을 준비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만약 네 후손들이 준비 없이 정원 앞에 이른다면 세계는 한 번 더 최후의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이샤마는 후손들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그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여인은 먼저 후손들이 원대륙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그때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고, 더 나아가 어머니의 뜻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대륙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것이야말로 이샤마가 처음부터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샤마 역시 후손들처럼 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준비되지 않았기에, 알려주더라도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걸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리라. 결국 지식만으로는 필연적으로 무가치하리라.

 

여인은 사라졌고, 이샤마는 절망한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꿈을 잊지 못했다. 그 시절의 일을 알지도 못하지만 알아도 소용없다면 자신은, 그리고 후손들은 어떻게 해야 준비가 된단 말인가?

과거 정원에 다녀온 열두 명이 서로 뜻이 달라 신들과 영웅들로 갈려 싸웠다는 것, 그래서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 원대륙이 파멸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러했다면 후손들도 정원에 들어가는 동시에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 결과 그때와 같은 다툼과 전쟁, 파멸이 닥친다면? 그건 이샤마가 진저리 쳐 온 가혹한 제국의 내분과도 비교되지 않는 재앙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후손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대신 깨달음을 얻게 될까?

그런 생각에 빠진 채 몇 달이 흐른 뒤 이샤마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신비한 여인이 아니라 왕궁처럼 보이는 화려한 방이었다. 제국의 황궁은 분명히 아니었고, 이샤마가 아는 한 근방의 어느 나라도 아닌 낯선 문물이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무희가 갇혀 있었다. 그녀는 떨고 있다가 마침내 부름을 받아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꿈속의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가 이윽고 그녀는 아기를 갖고, 귀한 대접을 받다가 왕자를 출산했다. 왕비는 시기심에 사로잡혀 무희와 아기를 죽이려 했지만 무희는 간신히 아기를 안고 거리로 달아났다. 고초 끝에 한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된 그녀는 멀리 도망쳐서 아기를 키웠다.

 

이샤마는 과거 어머니가 일찍이 황궁 밖으로 탈출해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을 전해 들었고, 비록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할망정 자신 또한 그 시절을 함께 겪었다. 그랬기에 꿈속의 풍경은 마치 파비트라와 이샤마의 뒷모습 같았다. 이샤마는 쉽사리 그들의 감정을 이해했다.

꿈속의 모자는 수년 간 고생한 끝에 한 대신의 방문을 받게 되면서 방랑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지막 장면은 여자아이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왕자 앞에 대신이 무릎을 꿇으며 ‘에페리움의 위대한 수호자 로안드로스 국왕 폐하의 아드님이신 폴리티모스 왕자님을 삼가 뵙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샤마는 에페리움, 로안드로스, 폴리티모스 등의 이름을 떠올리며 시종에게 기록을 뒤져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눈앞에 생생한 장면들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물론 이샤마는 화가가 아니었으므로 마음먹은 대로 잘 될 리 없었다. 그는 온갖 장면을 떠올리며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그려냈다. 이샤마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림이란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에페리움은 원대륙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 맞았다. 로안드로스라는 왕이 있었던 것도 틀림없었다. 다만 폴리티모스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이샤마는 날마다 꿈을 꾸었다. 이야기는 연결되었다. 폴리티모스 왕자가 어떻게 왕궁으로 돌아갔는지, 동생 팔라소스와는 어떻게 지냈는지, 어머니 에렉티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 갔는지, 마침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샤마는 그 모두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는 잠에서 깨면 늘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뭔가 미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폴리티모스 왕자를 찾아왔던 대신의 이름은 안탈론이었다. 그 이름은 이샤마도 알고 있었다. 기록 속의 안탈론은 최후의 전쟁에서 전쟁과 파괴의 신 키리오스를 보좌했던 사악한 마법사이자 불사의 존재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최후의 전쟁 시대와 로안드로스 왕의 시대 사이에는 수백 년이 가로놓여 있었기에 이 대신과 사악한 마법사가 동일 인물일 리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다.

 

꿈을 꾸고 그림을 그리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이샤마는 꿈속의 이야기에 푹 빠져 낮에도 몽롱하게 지낼 때가 많았다. 황태자의 그런 모습은 많은 사람의 근심을 샀다. 특히 나디르는 그런 꼴을 못 견뎌했다.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다가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늙은 신하의 특권을 방패 삼아 몇 번이나 잔소리까지 했을 정도였다.

페레 정벌군을 이끌라는 파비트라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 그때였다. 이샤마는 차마 명을 거역하지 못했지만 내심 걱정이 컸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 뭘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사실상 군대를 이끄는 것은 다른 장군이고 이샤마는 명목상의 총대장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날마다 꿈에 취한 상태로 전쟁터에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자마 꿈이 사라져버렸다.

이샤마의 상태는 한결 좋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감을 누를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전쟁과 같은 불경한 일을 저지르려 했기 때문에 신성한 꿈이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그렇든 아니든,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꿈을 되찾기 위해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샤마는 군대를 이끌고 메레디스 장군과 합류해 페레 부족들과 전투를 벌였다. 페레들은 막 권력이 교체되는 시기여서 단합되지 못했기에 신중하게 페레들을 관찰해 온 메레디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메레디스는 황태자를 뒷전에서 구경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또한 나디르와 뜻이 같았던 것이다.

이샤마는 비록 호위병들로 둘러싸이긴 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승전이 이어지면서 점차 정복전은 학살에 가깝게 변해갔다.

 

이샤마도 한동안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황태자에게 전쟁 경험이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뜻도, 메레디스의 뜻도 이해했고, 따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어머니도 전쟁터에서 이런 일을 늘 겪었겠거니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학살은 공포와 역겨움을 안겨 줄 뿐이었다. 부락을 불태우고 여자나 어린이까지 가차 없이 죽이는 일이 계속되자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메레디스도 본래는 이런 식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페레들은 한 번 여제의 자비를 받았으면서 다시 거역했기에, 이번에는 무자비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을 비록 머리로는 알았다 한들, 첫 전쟁에 내던져진 황태자가 마음으로 공감할 순 없었다.

 

이샤마는 전장을 이탈했다. 비록 황도로 돌아갈 길도 몰랐지만 전쟁터의 소음과 피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면 된다는 기분이었다. 정처 없이 걷던 이샤마는 어느새 로카의 장기말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페레 부락을 발견했다.

그간 정벌군이 페레를 학살해 왔으니 비록 황태자의 신분을 모르더라도 적대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 부락은 그렇지 않았다. 페레들은 황태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침착하게 환대하며 주술사에게 안내했다.

 

주술사가 준 술을 마신 이샤마는 환각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폐허가 된 제국 황도의 모습이었다.

잘 구획되어 있던 궁전과 길, 저수지와 성벽에서는 잡초가 자랐고, 신전은 무너졌으며, 정글이 도시를 침범하고 있었다. 새와 짐승들이 어슬렁거릴 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얼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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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뚜쉬뚜쉬 @안탈론 | 55레벨 | 환술사 | 엘프
    오늘 답은 로카라능! 하리하랄라야의 폐허가 아니라능!
    2014-10-22 10:48
  • 권동우 @안탈론 | 52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오늘 내용은 정말 잼있다.
    2014-10-22 11:50
  • 페리 @안탈론 | 55레벨 | 저격자 | 누이안
    하리하랄라야의 폐허는 환각으로 본것!
    2014-10-22 17:09
  • 유코 @진 | 55레벨 | 사제 | 누이안
    zzzzzzzz
    2014-10-22 18:45
  • 의창이 @진 | 55레벨 | 그림자 검 | 페레
    로카 ~
    2014-10-22 20:36
  • 고포후느 @안탈론 | 55레벨 | 첩자 | 누이안
    과거도 보고 700년 후 중립지역인 하리하랄라야의 폐허도 구경하고

    ㄷㄷ
    2014-10-22 22:04
  • 고포후느 @안탈론 | 55레벨 | 첩자 | 누이안
    는 잠깐만 왜 하리하랄라야 고른비율이 66%야
    2014-10-22 22:04
  • 루어매니아 @진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그보다 이곳엔 페레 어린아이가 언급되는데 왜 우리는 한번도 어린 페레를 본 적이 없을까요 ㅠㅜ
    2014-10-23 01:32
  • 명석몽 @안탈론 | 51레벨 | 폭풍 추적자 | 페레
    음..최후의전쟁과 로안드로스왕의 시대의  기간이 수백년이라고???
    2014-10-24 17:06
  • Solari @크라켄 | 52레벨 | 백기사 | 하리하란
    그런데 놀랍게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자마 꿈이 사라져버렸다.  <-이부분에서 출진하자마 꿈이 사라져버렸다는데 출진하자마자 아닌가여!?
    2014-10-26 13:25
  • 찹쌀떡 @안탈론 | 53레벨 | 길잡이 | 페레
    아니 시발 밤 새도록 파비트라 시리즈만 정주행 해왔는데 아직도 완결이 안났던거가 아 빡치네ㅠㅠㅠㅠㅠ
    2014-12-31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