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의 일기 - 여정의 시작
나나의 일기 - 여정의 시작
(추가바람)
생산 정보
- 나나의 일기 - 여정의 시작 원고 x1
- 종이 x10
- 기억의 잉크 x1
- 가죽 x5
소모 노동력 : 25
필요 숙련 : 없음
제작대 : 인쇄기
원고 획득 정보
- 증오 능력 각성 퀘스트 <증오를 일깨운 사랑> 완료
내용
#1
로사 언니가 내 두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매일 일기를 쓰렴."
깊은 바닷속처럼 잔잔하고 진한 언니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사 언니와 약속을 한 그 날부터 나는 계속해서 일기를 쓰게 됐다.
귀찮고 번거롭지만, 언니와 약속했으니까 계속 쓸 생각이다.
#2
두 눈을 감으면 항상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느낌으로 속삭이는 소리인데, 난 모든 사람이 이런 소리를 듣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문득, 귓가에 메아리치는 소리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우린 벽 안에 갇혀 있다
벽을 깰 수 있는 건 여왕뿐이다
여왕을 찾아야 한다 이런 말들이 눈을 감을 때마다 귓가에 울려 퍼졌다.
누가 내는 소리일까?
#3
전나무 성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로사 언니가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면서 물었다.
"누구랑 대화하는 거니?"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해서 언니에게 말해줬다.
언니는 심각한 표정을 하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나가 듣는 목소리는 언니한테는 들리지 않는 소리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나가 듣는 소리를 듣지 못해."
언니는 내게 목소리와 대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해오는 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언니와 약속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와 대화하지 않겠다고.
#4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속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날 위하는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를 멸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대할 때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 사람은 로사 언니와 로지아, 제임 등 몇몇뿐이었다.
로사 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언니는 안타까운 얼굴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도 우리 나나처럼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어렴풋이 보여. 하지만 이건 비밀이야. 그러니까 나나도 마음이 보인다는 건 언니랑 같이 비밀로 하는 거다."
나는 또다시 언니와 약속했다.
언니와 나만의 비밀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5
로지아는 나를 대할 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겉으론 날 위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론 멸시하는 편인데, 로지아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나를 하찮게 여긴다.
처음엔 로사 언니를 대할 때도 비슷했던 거 같은데, 요즘엔 로사 언니를 보는 속마음이 조금은 변해 있는 것 같다. 로사 언니에게 몹시 엄하게 대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로사 언니 역시 나처럼 로지아의 그런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탓인지, 로지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
꼭 저렇게까지 귀찮게 로지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로사 언니는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나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언니처럼 로지아의 마음을 맞출 생각이 없다고 하자, 로사 언니는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다행이다.
#6
흙냄새와 가축 분뇨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사냥매 우리를 지나서 커다란 창살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창살 안에는 볼품 없는 모습이지만 거대한 새가 앉아 있다.
로사 언니는 매일같이 이곳에 와서 새에게 말을 건다.
나는 조용히 로사 언니 등뒤에서 지저분한 얼룩이 털 곳곳에 묻은 볼품 없는 새를 바라봤다. 겉 모습은 볼품이 없어 보일지 몰라도 저 새는 아주 강하다.
내 안의 본능이 저 새 앞에서 나 자신을 숨기라고 외친다.
전나무 성 사람들이 날지 못하는 새라고 모두 조롱하는 저 새 앞에서 나는 자신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다.
다행히 새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
눈의 새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로사 언니 뿐이었다.
다행이다.
#7
제임은 로지아와 함께 나를 대하는 겉모습과 속마음이 별로 차이 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제임은 자신이 내 사촌 오빠라며 나를 귀여워했다.
그는 처음엔 내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려주길 기대했으나, 내가 기대에 부응하지 않자 곧 내 모습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임은 로지아와 로사 언니 몰래 달콤한 과자나 사탕 따위를 들고 와 내게 건네곤 했다.
"로사가 나나를 위해서 고생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나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사의 말은 꼭 들으렴."
제임이 건네준 달콤한 쿠키를 오물오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제임은 때때로 이야기책을 들고 와서 내게 읽어주곤 했는데, 그다지 재미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8
제임이 어느 날 '겨울의 남매'라는 책을 들려줬다.
책의 내용은 어느 남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 신이 되어서 복수를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겨울의 신 네베가 혹독한 추위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기 죽음을 복수하는 것인데, 네베의 누나인 여름의 신 네블라가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 따스함을 줬지만, 이 자애로움은 동토의 얼음을 녹여 홍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이야기였다. 네베가 혹독한 추위로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북메어의 사람들은 덕분에 강철같은 의지를 지니게 되었고, 네블라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했지만, 홍수를 발생시켜 재난을 일으킨 것이라며, 제임은 로지아의 차가운 모습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제임은 내가 로지아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난 로지아에 대해 별생각 없는데.
#9
로사 언니와 제임이 결혼을 하게 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다쟁이 도로시가 하녀들 사이에 섞여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제임 공자와 키프로사 아가씨가 결혼하고, 오키드나가 정식으로 데이어 가문의 딸이 된대!"
제임과 로사 언니가 결혼해서 부부가 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쁘지도 않다.
둘 다 내게 잘 해주니까.
#10
로사 언니가 두꺼운 털옷을 내게 입혔다.
"지금부터 우리 둘이서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날 거야."
난 여행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로사 언니에게 여행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로사 언니는 내가 느끼는 궁금함을 잘 아니까.
"여행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 데이어를 떠나서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하는 거야. 우린 대륙의 심장이라는 델피나드로 갈 거야." 델피나드라는 말을 꺼낼 때 언니의 심장 소리가 커지는 게 느껴졌다.
로사 언니는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 몹시 설레하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제임이 주는 달콤한 과자를 먹을 수 없을 거 같아 아쉽지만, 로사 언니의 표정을 보니 그냥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11
새벽 일찍 데이어 성을 나와서 한나절 동안이나 말 위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데이어 성이 아주 작은 크기로 보이는 언덕에 다가가자 한 사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제임이었다.
제임은 언니에게 책 몇 권을 주고, 내게는 달콤한 과자가 담긴 주머니를 줬다.
로사 언니와 제임이 서로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마음의 목소리가 오가는 것 같았다.
제임도 로사 언니와 나처럼 마음의 소리가 보이는 걸까?
분명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 순간만큼은 제임도 우리처럼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제임을 뒤로한 채 한참 달렸을 때, 언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