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의 일기 - 운명의 굴레
나나의 일기 - 운명의 굴레
(추가바람)
생산 정보
- 나나의 일기 - 운명의 굴레 원고 x1
- 종이 x10
- 기억의 잉크 x1
- 가죽 x5
소모 노동력 : 25
필요 숙련 : 없음
제작대 : 인쇄기
원고 획득 정보
- 증오 능력 각성 퀘스트 <증오를 일깨운 환술> 완료
내용
#1
하라마칸드로 떠나는 일행에는 에안나와 아란제비아가 끼어 있었다.
에안나는 루키우스와 연인인 탓에 델피나드 총독의 딸인데도 일행에 낀 것이었다.
아란제비아는 아란제브의 대녀인데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매우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아란제비아가 품은 기운은 심연과 비슷한 정신적인 영역인데, 그 느낌이 매우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올로보다 더한 집착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란제비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항상 그녀의 대부인 아란제브가 있었다. 로사 언니와 아란제브의 관계 때문에 혹시라도 아란제비아가 로사 언니에게 음흉한 술수를 쓰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녀는 로사 언니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로사 언니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엘프와 인간이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운명의 실타래가 그녀의 몸에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게 보인다.
#2
델피나드를 떠난 일행은 네미 강의 수원인 미메탄 고원에 도착했다.
히라마 산맥이 세계의 지붕인 양 굽어보는 미메탄 고원에 도착하자 일행은 산 위에 있다는 히라마칸드로 가기 전에 이곳에서 ‘미메탄의 마법사’ 레이븐의 자취를 찾아보기로 했다.
로사 언니가 델피나드를 떠나 일행과 함께 긴 여정에 나선 것은 레이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와 로사 언니의 아버지인 레이븐을 나는 본적이 없다.
다만, 그가 나를 심연의 여왕으로 태어나게 했다는 것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왜 나를 심연의 여왕으로 만든 걸까?
그는 왜 심연에 갇힌 나차쉬를 세상에 꺼내려 하는 걸까?
많은 의문을 품은 채 로사 언니의 손을 잡고 미메탄 고원으로 들어갔다.
#3
한나절 수색한 끝에 일행은 거대한 동굴을 발견하여 깊이 내려갔다.
하루가량을 내려가자 갑자기 인공적인 통로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수많은 변이 생물체들이 노역하고 있었다.
변이 생물체의 모습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파충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나는 이 변이된 생물체가 심연의 기운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동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하게 꾸민 홀이 나타나더니 아름다운 남녀가 나타났다.
"저희는 위대한 마법사를 섬기는 시종입니다. 위대한 마법사께서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름다운 남녀에게서도 심연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저들이 말하는 위대한 마법사가 바로 레이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4
실내는 마치 궁전처럼 화려했다.
넓은 홀에 화려한 옷과 장식으로 자신을 꾸민 마법사가 나타났다.
나와 로사 언니의 아버지인 레이븐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일행을 반겼다.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준비했는지 많은 음식과 함께 아름다운 무희들이 나와 환영 행사를 벌였다.
로사 언니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레이븐을 바라봤다. 주변에 울려 퍼지는 음악과 무희들의 춤과 레이븐의 목소리가 합쳐지면서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분리된 공간은 육신의 공간과 정신의 공간이 분리된 것으로, 심연과 같은 정신 공간이 생겨난 것이었다.
분리된 공간에서 나는 레이븐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정도 공간쯤은 단번에 뛰어넘어 로사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5
레이븐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컸구나."
나는 차갑게 말했다.
"우릴 왜 부른 거지?"
레이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걸 눈치 챘다니... 벌써 여왕이 될 준비가 끝났구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왕 따윈 되지 않아!" "네가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나는 내 안에 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선언하듯 외쳤다.
"내겐 로사 언니가 있어! 그러니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
레이븐이 만든 분리된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일행이 함께 들어왔다고 생각한 궁전 역시 사라졌다. 사라져 가는 환영 속에서 레이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피하려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란다. 그건 누구보다 오키드나 네가 제일 잘 알겠지!"
#6
일행은 다음날 미메탄 고원의 풀밭에서 깨어났다.
모두 똑같은 꿈을 꿨다며 자신들이 겪은 일을 꿈이라 생각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나도 모든 게 꿈처럼 여겨졌다.
환상이었던 궁전과 아버지 레이븐과 심지어 지금 내 옆에 있는 로사 언니까지도.
로사 언니는 내가 무사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는지 나를 품에 꼭 안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사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콩닥콩닥 뛰는 언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확인했다.
머릿속에 레이븐의 마지막 말이 떠나질 않는다.
피하려 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어떻게 해야 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언니와 계속 손잡고 있을 수 있을까?
#7
일행은 하라마 족의 마을에 들렸다가 세계의 배꼽이라는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에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선 운명의 굴레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심연의 여왕이 되는 운명을 피하는 방법 이외의 모든 일이 하찮게 여겨졌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잊은 채 걷고 또 걷기를 계속하자 어느새 나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 앞에 온 자,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열지 말라.'
문 위에 쓰인 경고문을 본 일행은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토론했다.
그들이 서로 이런저런 주장을 하며 토론할 때 나는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봤다.
#8
여왕의 힘이 점점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분리된 시공간을 넘고 벽 너머의 것을 내다보는 능력이 생겼다.
눈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벽이라도 나는 전부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거대한 벽 너머는 내다볼 수 없었다.
운명의 실타래 역시 벽에 닿자 실이 끊어져 버리며 사라졌다. 눈앞의 거대한 벽은 내 능력을 초월한다.
이 초월적인 힘이라면 내 운명의 굴레마저도 초월하지 않을까?
레이븐과의 만남 이후 혼란과 절망에 휩싸여 있던 내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9
거대한 문에 손이 닿는 순간,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열렸다.
문 안에는 예배당처럼 생긴 천장이 높고 둥근 홀이 있었다. 그리고 홀 중앙에는 고풍스러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뭐라 말하기 힘든 에너지가 그들의 몸과 정신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모든 더러움이 씻겨 나가고, 모든 죄가 사해지고, 모든 망각과 혼란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로사 언니와 손잡고 평생 행복하게 살리라.
#10
문은 들어온 쪽뿐 아니라 홀의 맞은편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곳 너머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왔고,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속에 황홀한 감정이 가득 찼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그러나 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됐다.
홀의 의자 위에 앉아 있던 곤충처럼 생긴 작은 소녀가 날개를 펴며 내게 날아들었다.
소녀가 내 어깨에 앉는 순간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몸이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여 홀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렸다.
#11
날개 달린 소녀가 내게 말했다.
"너는 이제 이곳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신의 정원의 신성한 문지기가 되었다. 수만 년일지 수억 년일지 모르는 세월 끝에 찾아온 네가 이제 앞으로의 긴 세월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수만 년? 수억 년? 긴 세월을 짊어지라고? 무슨 소리야!
날개 달린 소녀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렸기 때문에 이 순간부터 정원의 힘은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제 닫을 수 없다. 세상은 변할 것이며, 그 방향이 어느 쪽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날개 달린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지기는 세상과 정원 사이에 존재하면서 정원의 힘이 이 세상에 조화롭게 흘러나가도록 하는 자이며, 떠날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네가 대신해 줄 자를 구하지 못한 채 이 자리를 떠난다면 이 세계는 힘의 흐름이 폭주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다."
#12
자기 할 말만 해버린 채 사라진 날개 달린 소녀 때문에 나는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심연의 여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정원의 문지기가 돼버리다니...
로사 언니는 당황한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정원 안에 가면 나나가 문지기에서 해방될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언니가 나나 대신 문지기가 될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알았지?"
로사 언니가 정원에 들어가려면 내가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한다.
나는 로사 언니를 믿는다. 잠시 손을 놓더라도 금방 나를 위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일행과 함께 정원에 들어가는 로사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니가 빨리 돌아오길 빌었다.
태어나서 로사 언니와 이렇게 떨어진 건 처음이었으니까.
#13
시간이 흐른다. 계속 흐른다. 하염없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수백 년이 흐른 걸까? 수천 년이 흐른 걸까? 아니면, 수만 년이 흐른 걸까?
로사 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나는 로사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항상 돌아왔는데.
로사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나나는 죽었다.
나나의 일기도 끝이다.
증오스럽다.
굴레를 벗어나도 다시 나를 속박하는 이 빌어먹을 운명이.
딸을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도구처럼 이용한 레이븐이.
믿음을 배신한 키프로사가.
이 빌어먹을 세상이.
모두 증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