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1: 저승의 꿈
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1장. 저승의 꿈
나방 한 마리가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낮은 너무나도 소란스러웠다. 황금 혀 항구. 휴양지로 유명한 이곳이 시끄러운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요 며칠간은 정말로 심했다. 어딜 가나 사람, 풍선, 깃발 그리고 폭음과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저녁이 되어 소란이 가라앉고, 길손이 뜸해지는 늦은 밤이 되어서 나방은 덤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 몸을 싣고 달빛 아래 우뚝 솟은 돛대 사이를 건넜다.
나방은 한 창가에 내려앉았다. 살짝 들쳐진 발 뒤로 등불이 새어 나오는 아래, 금발의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갑옷은 발아래 아무렇게 뒹굴고 있었지만 검집에 담긴 칼은 꽉 안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나방은 그런 그녀의 머리맡에 있었다. 그 머리맡 등불이 요염한 불꽃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나방이 불꽃을 향해 한 발, 두 발. 주춤 주춤 기어갔다.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회색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나방을 덮쳤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손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
그 소리에 금발의 여인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손에는 검집에서 뽑은 칼이 들려 있었다. 푸른 동공은 그녀의 질린 입술만큼이나 심하게 떨고 있었다.
거대한 손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나방을 그 안에 담은 채로 천천히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손을 펼쳐 자신의 포로를 풀어주었다. 포르르 날아가는 나방을 뒤로 한 채, 거대한 손의 주인은 침착하게 발을 내리고 창문을 닫았다.
"...요리사님?"
뒤에서 금발의 여인이 그를 불렀다.
그녀의 말마따나, 거대한 손의 주인은 요리사의 하얀 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평범한 요리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천장을 뒤덮기라도 할 듯 큰 덩치에 두 개의 금색 뿔을 지녔다는 것. 두 팔의 두께가 기둥 같고, 일그러진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전쟁을 위해 태어난 듯한 그 모습에, '워본(Warborn)'이라 불린다는 것. 그가 낮고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또 그 꿈인가."
금발의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칼을 늘어트렸다. 그러모은 다리에 머리를 파묻더니 긴 신음 소리를 낸다.
"...네."
그녀가 한탄처럼 내뱉었다.
"잠은 다 잤네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리사.
"야식, 더 필요한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가 애에요? 먹을 걸로 달래게?"
고개를 끄덕인 요리사가 테이블 위의 컵과 빈 식기를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그 자세로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조금만요."
* * *
잠시 후 금발의 여인은 잠옷 위에 숄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왔다. 시큼한 술 냄새와 스튜의 달짝지근한 향기가 뒤섞인 홀. 먼저 내려간 요리사는 그런 홀이 내다보이는 작은 주방에 그 큰 덩치를 구겨 넣고 있었다. 그의 솥뚜껑만 한 손이 조막만 한 크래커 위에 무언가를 예쁘게 얹기 위해 악전고투 하고 있는 것은 꽤 볼만한 장면이었다.
"여~ 세자비 님!"
한쪽에서 높고 가르랑 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한쪽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그녀를 부른 것은 고양이를 닮은 종족인 페레의 여성이었다.
"엘테르? 아직 안 잤어요?"
엘테르라 불린 페레가 손짓했다. 금발의 여인은 그 옆에 앉았다. 엘테르는 술잔을 지켜들고 싱긋 웃어 보이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세자비 님이야말로. 아직 한창때인 처자가 노친네처럼 한밤중에 어정거리고 있네? 뭐야? 잠자리가 안 좋아? 걱정이라도 있어? 남편이 속을 썩여? 어제 경기 결과가 거슬려? 한 잔 마시고 싹 다 잊어버려볼래?"
" 한 잔..."
문득 옆을 바라보니 화려한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엎어져 있었다. 관모는 비뚤어지고, 소매엔 술을 엎지르고, 무릎 위에는 비파를 둔 채 인사불성인 걸 보니 엘테르의 기세에 휘말려 희생된 모양이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니, 차랑 카나페면 됐어요."
"살쪄."
"술은 안 찐대요?"
엘테르는 깔깔거리며 자기 배를 두드려 보였다. 매일 그렇게 먹고 마시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탄탄하고 늘씬한 복근이 보들보들한 털로 덮여 있었다. 저기에 배방구를 해보고 싶다는 상스러운 생각이 스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금발의 여인 - 세자비는 물컵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또 그 꿈인가 보네."
"?!"
사레들릴 뻔했다. 콜록거리면서 입술을 훔치는 그녀를 엘테르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간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사냥 자세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네. 맞아요. 그나저나 오늘도 한 명 보냈군요?"
"아, 저거?"
엘테르는 술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날름거리며 대답했다.
"몰라. 비파 켜는 솜씨가 좋길래 말을 걸었더니 저렇게 됐어."
"말만으로 사람을 취하게 했어요?"
"아니 그게, 처음엔 내일 경기 때문에 긴장된다고 하더라구. 그러면서 주구장창 비파만 켜 대는데 계속 같은 곡만 켜 대니까 손님들도 슬슬 짜증을 내는 거야. 그래서 술을 좀 권했더니 슬슬 신세한탄을 늘어놓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일 경기에 나갈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고요?"
"어. 궁금했거든."
엘테르는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동방의 남자에게 눈을 맞췄다. 세자비는 '어련하시겠어요.'라고 핀잔을 줄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다는 사춘기 소녀라도 이 철없는 페레보다는 호기심이 덜할 텐데.
"처음 건네준 술잔을 각 잡고 받아 마시는 건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저 지경이 되기 직전까지도 술 마시는 자세가 안 흐트러지더라? 그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하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 줬더니 또르르 눈물을 흘리더라고. 그것도 소리 하나 안 내고."
엘테르가 동방의 남자 앞에 넘어져 있는 술병을 슬쩍 건드리자 테이블 가장자리를 따라 도르르르 돌았다. 완전히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뭐 마지막에는 '어마마마...' 이러면서 저렇게 됐지만."
"..."
"근데 어마마마 면..."
엘테르는 세자비의 옆으로 바짝 붙더니 소곤거리듯 말했다.
"...얘 그거 맞지? 하슬라의 왕세자."
"...맞아요."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하리하라 대륙. 그 대륙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하슬라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밀 대신 쌀을 먹고, 산 자보다 죽은 자의 집을 더 화려하게 짓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황금 기와의 도시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그 나라에는 네 명의 공주와 한 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중 왕자는 한때 행방불명 된 적이 있단다. 세간에 알려진 건 대략 그 정도. 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그 사건을 일으킨 건 왕가의 외척이었다고도 했다. 왕자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뒤에도 외척들의 그림자를 하슬라에서 몰아내기까지는 꽤 시일이 걸렸다.
그런데 그 하슬라의 왕세자가 뜬금없이 서대륙의 세자비가 주최하는 무투회에 참가 신청을 낸 것이다.
"이 시국에, 잘도 받았네. 저런 걸."
엘테르가 혀를 찼다.
세자비도 동감이었다. 동대륙과 서대륙은 사이가 나빴고 최근에는 국지전까지 치렀으니까. 그런 상황에 동쪽 끝의 소국이라고는 해도 동대륙의 왕세자가 서대륙의 행사에 참가한다는 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소문이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닮았네."
"...뭐라구요?"
"닮았다고. 멀쩡한 집 두고 이런 데서 자는 세자비나, 바다 건너와서는 이런 데서 술 푸는 저 금수저 왕세자나. 내가 좀 돌아다녀 봤는데, 이런 괴짜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한자리에 있는 건 꽤 진풍경이거든? 히힛."
'그 세자비에겐 멋대로 말을 놓고, 그 왕세자는 떡이 되게 만든 본인은 괴짜 아니냐'고 반문하려다가 그만뒀다. 말마따나 세자비 자신도 자기가 얼마나 괴짜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경비병에게 말해둘게요. 대사관에서 모셔 가라고 하죠."
"아. 이미 말해뒀어. 걱정 마. 그렇지, 주인장?"
한껏 몸을 뻗대며 자신을 부르는 엘테르를 향해, 요리사는 '음...' 하고 한 마디 했을 뿐. 그의 눈과 손은 여전히 크래커에 집중되어 있었다. 엘테르가 한숨을 쉬며 핀잔을 주었다.
"무뚝뚝하긴... 그건 그렇고, 꿈 말인데."
...실패였나보다. 화제를 돌리는 건.
"주인장에게 들었어. 무슨 꿈을 꾼다며?"
"..."
"좀 자세히 말해봐. 주인장 입이 좀 무거워야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곤, '비밀이다.' 한 마디로 사람 애간장 태우더라고."
세자비는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냥 꿈이 아니었으니까.
몇 년 전, 그녀는 여행을 했었다. 그녀 민족의 시조인 두 사람의 행적을 쫓는 여행을. 한 사람은 '에안나'. 죽음의 여신 '누이'라고도 불리는 자. 다른 한 사람은 '루키우스'. 누이 여신의 배필이자, 영원히 사는 자.
그 여행의 끝에서 그녀는 살해당했다.
"... 사실 말이지."
머뭇거리는 세자비를 기다리다 지친 엘테르가 이윽고 운을 떼었다.
"내가 자기에 대해선 대충 알잖아? 내 정보망을 통해서 들어오는, '억지 결혼을 피해 도망친 세자비 후보, 돌아오더니 사람이 싹 바뀌었다!' 뭐 이런 소문 말이야. 그 세자비가 무투회를 연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 초면에 했었지?"
"그랬죠. 무투회 도박판에서 다 잃고 인사불성인 상태로."
"그건 좀 잊고! 여하튼 내가 들은 다른 소문도 있는데 그중 제일 흥미로운 게 뭔 줄 알아?"
"..."
세자비는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처럼 빙글거리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엘테르의 눈은 답을 구하듯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세자비가, 되살아 난 사람이래."
"..."
되살아 난 사람.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았다거나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괴물로 되살아 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여행 도중 살해당했다가 저승에서 온전한 몸으로 되돌아온 자. 기록상 수천 년간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완전한 부활.
그 유일한 체험자가 바로 그녀였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개인 정보망."
"헛소문이라고 하면..."
"안 믿지."
"그럼 알면서 왜 굳이..."
"걱정되니까?"
갑자기 옆에서 자고 있던 왕세자가 벌떡 일어섰다.
"걱정?!"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눈은 아직도 반쯤 감긴 채였다.
"걱정... 없... 숩니다! 느에. 소오자, 쉴망 시키지...않겠사우웁니다! 하아슬라는 운선 누님! 과희 누님! 쥐향 누님!”
그렇게 주정을 늘어놓던 왕세자는, 문득 소매로 입가를 쓱 훔치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술여야아...?"
왕세자의 까만 동공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제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어이없어하는 엘테르를 대신해 세자비가 물컵을 건네자 수줍게 손을 내밀어 받아 마신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 오른 게 비단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 야, 금수저."
엘테르가 싸하게 중얼거리자, 왕세자가 받아쳤다.
"...뭐야, 테미캣."
테미캣이란 페레를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엘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기 이분 세자비 말이야, 어때?"
"?"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이분 고민이 있나 보더라구. 고민되면 툭 털어놓고 이야기해서 풀지, 그걸 혼자 먹고 죽으려고 하네?"
"... 세자비?"
왕세자는 아직도 정신이 덜 든 모양이다. 비딱한 관모를 눌러 세우면서 이쪽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기겁하며 머리를 처박았다.
"소... 송구합니다! 세자비 마마! 소인,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세자비는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왕세자 전하. 저도 이런 모습인걸요."
야식 주워 먹고 퉁퉁 부은 얼굴에, 베개에 눌어붙어 떡진 머리에, 흐트러진 잠옷 위에는 숄만 걸친 모습 말이지. 관모 비뚤어진 것쯤 뭐 대순가.
"어... 음. 하지만..."
"그리고 본인도 일국의 왕세자신데, 계속 그러시면 서로 민망할 것 같네요."
"아, 넵!"
머리를 처박은 채 웅얼대던 왕세자가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번쩍 들자, 엘테르가 헛기침을 두 어번 했다.
"이렇게 관대한 분이라고, 우리 세자비는. 근데 그런 분 꿈자리가 뒤숭숭하단 말이야? 밤이면 밤마다 잠 못 이룰 정도로."
"꿈?"
그렇게 판을 깔아놓고 히죽 웃으며 이쪽을 보는 엘테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세자비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 먼저, 이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이고 믿기 힘든 것이라, 타국의 왕세자께 들려드릴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비밀 서약을 받고 싶군요."
"아, 넵."
"저는 저승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저승의 일을 종종 꿈으로 꿉니다."
"저승이요?"
"네. 저승. 그중에서도... 전쟁에 대한 꿈."
저승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천 년 전. 수많은 종족의 고향인 먼 북쪽 대륙. 원대륙이라 불리는 그곳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를 가엽게 여긴 누이 여신은 자신의 세계인 저승에 산 자를 위한 길을 열어 그들을 이 땅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세계를 파멸로 이끌던 파괴신의 군대가 그 뒤를 쫓아 저승으로 들어왔다. 그 군대가 새로운 대륙까지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남았고, 오랜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파괴신의 군대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 남은 자들을 일컬어 '최후의 군대' 또는 '저승 방어군'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지요. 물론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세자비는 말을 멈췄다. 엘테르와 왕세자가 굳은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왕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구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괴담이 있고 그 대부분은 낭설이나 가끔은 진실도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하기 전까지 진위를 분간하기 힘든 법이지요. 소인도 원대륙이라 불리는 그 땅이 선조들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것은 그저 고루한 서책 속의 전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네, 전설인 줄로만 알았지요. 하슬라의 시조이신 류이진의 시대 이전, 파비트라 대 여제께서 동대륙을 통일하시기도 전, 저희 선조가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이주하기에도 한참 전의 일이니 검증도 안된 헛소문이나 다름없는..."
"... 요점만 말해, 금수저. 요점만."
"소인도 이 테미캣도, 원대륙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소인이 남녀 칠세 부동석이 법도인 하슬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자리에서 이 테미켓과 의기투합하여 술잔을 나눈 것은 둘 다 같은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둘이서 같이 원대륙에 갔다는 건 아닙니다. 각자 사정이 있어서 따로 다녀왔고, 그 와중에 겪은 일은 필설로 다 형언하기 힘든..."
엘테르가 역정을 냈다.
"요점!"
"... 원대륙에서 저승의 문을 보았습니다."
엘테르는 왕세자를 향해 눈총을 한 번 더 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뭐. 금수저 말마따나 어쩌다 보니 그쪽 저승의 문도 보게 됐어. 그런데 닫혀 있더라? 정확히는 완전히 박살 나고 뭉개져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들어가진 못했지."
"그리고 파괴신의 군대가 그 땅을 횡행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니 세자비의 말씀을 믿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세자비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네요."
요 며칠 새 그녀를 괴롭히는 꿈. 잠을 설치고 가위에 눌리게 만든 꿈.
"그 저승의 전쟁에서, 조상님들이 지고 계십니다. 파괴신의 군대에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 그게 제가 꾼 꿈이에요."
"허어..."
"어... 진짜라면 위험한 거 아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모르겠어요. 저승에 다시 다녀와야 하나... 싶네요."
"다시? 산 자도 저승에 다녀올 수 있는 겁니까?"
왕세자의 질문에 묘한 화색이 돌았다.
"네. 가능하지만...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아요. 저승은 산 자가 그 안에 오래 머물수록 뒤틀리고 상처 입거든요. 조상님들처럼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무른 나머지 이미 반쯤은 저승의 존재가 된 자들이라면 다르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전이문 마법에 쓰이는 '저승의 돌'이라 불리는 물건 있지? 듣기로는 그것도 저승을 통과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오는 마법이라 하던데. 그걸로 어떻게 안될까?"
"그건 저승을 순간적으로 경유하는 물건이에요. 안에서 뭘 할 수도 없고요."
다시금 침묵.
"저..."
문득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