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4: 답을 구하는 자들
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4장. 답을 구하는 자들
"... 야."
찰싹.
"... 으음."
왕세자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쉬게 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제 막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평범한 저주 후유증이야. 늘상 있던 일이라 괜찮다. 야! 정신 차려!"
찰싹찰싹.
왕세자의 흐린 눈에, 걱정스러운 여인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흑발, 금발, 짙은 갈색 머리. 페레의 고양이 같은 얼굴도 있었다.
"뭐야... 극락에 온 건가..."
"...극락! 좋아! 하네! 현세다, 너 개망신 당한!"
여자 무사가 화를 내며 연거푸 내려친 배개에 맞은 왕세자는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베개를 틀어쥐고 신음했다. 그를 내려다보던 여인들 중 하나 - 세자비 마리안이 여자 무사를 향해 말했다.
"괜찮은... 모양이네요?"
개구리로 변신한 왕세자 때문에 응급실로 달려온 건 그의 호위 무사들 뿐만은 아니었다. 관람석에 있던 마리안과 몰래 숨어있던 엘테르. 상대 팀인 '차가운 유혹' 용병단도 자잘한 상처 치료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우르르 들어와 있었다. 물론 가나 너츠도.
"허참. 개구리 왕세자셨다니."
용병대장이 사람들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중얼댔다.
"우리가 동화랑 싸운 거야? 이래서 몸 값 오르겠어?"
여자 무사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꽂히자, 그는 황급히 변명했다.
"어... 뭐, 미안하게 됐수. 난 가나 - 저 녀석이 하자고 해서..."
가나도 여자 무사의 시선을 피했다.
"뭐야. 싸움인데 당연하잖아. 그보다 누구야? 경기 전에 술 퍼 먹인 녀석."
모두의 눈이 엘테르를 향했다.
"나... 난 물 좀 떠 올께!"
그녀는 진작부터 살금 살금 빠져나가려다, 엉덩이에 눈총을 잔뜩 맞고는 어마 뜨거라 줄행랑을 놓았다. 여자 무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구 탓할 생각 없다. 제 몸 간수 못한 이 바보 오라비가 멍청한 거지."
"오라비? 설마... 하슬라의 공주신가요?"
여자 무사는 마리안을 향해 포권지례(抱券之禮)를 올렸다.
"연 가문의 수려라고 한다. 모자란 오라비를 보필하여 하슬라의 무용을 떨치고 오라 아바마마께서 명하셨다만, 이렇게 본선 초장부터 초를 쳤으니..."
수려 공주는 베개로 얼굴을 틀어막고 있는 왕세자를 향해 말했다.
"야, 텄다. 가자, 가."
"... 안 간다."
"가자니까?"
"... 안 간다고."
"가자고!"
"안 간다고! 못 간다고!"
왕세자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베개를 집어던지자, 상처를 치료하느라 벗겨놓은 상체가 드러났다.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왔는데, 어떻게 가냐고!"
왕세자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날아온 베개를 잡아챈 수려 공주는 어이없어하다가 되던지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위나 가려. 그럼 뭘로 만회할 건데? 실력들을 보아하니 우승은 아까 '그대여 어디'? 거기 엘프들인가가 따놓은 당상인 것 같고. 그럼 2위나 3위라도 해야잖아? 그런데 본선 첫날부터 몸 관리도 못해, 망신도 당해, 그러니 앞으로의 기싸움에서도 밀려 - 그럼 뻔하잖아? 시상대도 못 올라간다구!"
"... 옛말에,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 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라, 뭐 그거? 우리한테 무 벨 시간은 남았어? 고향에서는 반란군이랑 역병이 들끓는데 아직 중재책도 치료제도 못 찾아서 궁여지책으로 왕실 재정 털어 빈민들 초대하는 잔치만 굴리고 있는데 - 베로에 황금 기와 다 벗겨먹고 난 뒤에는 뭘로 버틸 건데? 여기서 국위선양해서 외교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 믿고 아바마마가 고요한 비취 중에서도 일급 무사들 뽑아서 나랑 같이 보냈잖아. 근데 뭘 더 어떻게 하겠다고?!"
폭풍같이 쏟아지는 질타에 턱이 부서져라 이를 꽉 깨물던 왕세자는, 이윽고 한 마디를 뱉었다.
"저승..."
"뭐?"
"저승에 갈 꺼야..."
마리안은 황급히 주변을 물렸다.
"자, 모두? 수려 공주님 빼고 자리 좀 비워주시겠어요? 왕세자께서 무척 심란하신 듯합니다. 저승 운운 하시는 걸 보니..."
그리고 나가려는 사람들 중 가나를 발견하더니 덧붙였다.
"거기, 용병님? 당신은 남아요."
"어... 나는 왜?"
"이 사달을 냈으니 책임져야죠?"
"아니, 그게 왜 내 책임... 알았어."
마리안의 닥치고 앉으라는 손짓에 가나는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수려 공주도 호위 무사들의 귀에 뭐라고 속삭인 다음 모두 내보냈다. 방 안에는 이제 마리안과 왕세자와 수려 공주, 그리고 가나만 앉아 있었다.
"... 말해봐."
수려 공주가 입을 뗐다.
"책임지고 자진 뭐 그런 이야긴 아닐 테고, 무슨 소리야? 저승이라니."
"...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될까요?"
마리안은 어제 밤의 이야기를 차근 차근 꺼냈다. 수려 공주의 냉랭하기 짝이 없던 눈이 점점 커져가더니 다시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 그렇군. 산 사람이 저승에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서 어쩔 셈인데, 오라비?"
"태조 폐하를 알현할 거다. 하슬라 부흥의 지혜를 빌리겠어."
동대륙은 일시적인 통일 제국을 이룬 적이 있다. 그 제국이 네 개의 나라로 갈라졌을 때, 동쪽의 하슬라를 이끈 사람이 태조 류이진. 통일 제국의 군사 출신이자 현명함으로 이름난 왕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 하슬라는 동대륙에서 선두를 다투는 나라였고, 수도 베로에에 그 유명한 황금 기와가 씌워진 것도 그때였다. 그 태조의 혼백을 만나 작금의 하슬라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빌리겠다는 것이 왕세자의 설명이었다.
"... 좋아."
수려 공주가 결심했다는 듯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쳤다.
"나도 간다."
"안돼."
"왜!"
"역병과 빈민은 몰라도, 당분간 반란을 다스리려면 군무에 밝은 사람이 필요해. 우리 연 가문에서는 그게 너와 나뿐이고. 그러니 하나는 남아야지."
"..."
"그리고 다름 아닌 태조 폐하를 뵙는 거다. 후계자가 직접 가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겠지."
"...말이나 못 해야지, 정말. 알았어."
수려는 일어서서 마리안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라비를 부탁한다. 아니, 하슬라의 명운을 부탁하는 셈이로군. 염치 불고하고..."
"알겠습니다. 왕세자 전하를 잠시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마리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당장 갈 수 있는지는 미지수에요. 그리고 설령 그리되더라도 경기는 마저 치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오라버님의 빈자리에 대리 선수라도 채워서 말이죠. 여기서 그만두시면 정말로 국위에도 누를 끼치시게 된다 생각합니다."
"... 세자비의 말이 맞다. 화기를 주체 못 하고 판단을 그르칠 뻔했군. 그 제안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지."
궁금함을 참지 못한 가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대리 선수라는 게 설마 나야? 그래서 남으라고 한 거야?"
"아니? 너도 가야지, 저승."
"뭐? 내가 왜..."
"너도 있잖아?"
마리안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저승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
"..."
"아냐?"
가나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마리안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한채 꼬아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더니 한숨을 뱉었다.
"... 하아. 여전히 넓구나, 그 오지랖. 덕분에 멧돼지 뛰놀던 고향 땅에서 끌려 나온 촌놈은 뭣도 모르고 세계의 비밀이니 뭐니 잔뜩 마주쳤는데."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다, 머리를 배배 꼬다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 좋아. 동료들의 신용을 좀 잃겠지만, 기회에겐 뒷머리라는 게 없는 법이니까."
"노르예트의 신용을 대신 잃지 뭐. 모자라면 시댁 신용도."
"두 왕관을? 네 삼촌 들으면 기절하겠다."
크크크 하며 마주 웃는 두 사람을 두고, 왕세자와 수려 공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저녁이 되어 그날의 나머지 경기가 파하자, 마리안과 왕세자 그리고 가나는 단촐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점으로 향했다. 수려 공주와 호위 무사들이 대동하겠다고 나섰지만 마리안이 어제와 같은 일은 없을 거라 재차 약속하자 다들 숙소로 돌아갔다. 경기용 보호막 덕분인지 왕세자의 부상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통증은 쉬이 가시지 않는지 찌푸린 얼굴로 걸음을 멈춰 서고 '조금만... 천천히...'를 반복했다. 가나가 투덜거리며 그런 왕세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야, 마리안. 너도 치유 마법 쓸 줄 알잖아."
"응급실 치유사들보단 못해. 그냥 걸어."
"쳇."
가나가 주점 별실의 빈자리에 왕세자를 앉히자, 엘테르가 쪼르르 달려왔다. 뒤에 어디서 본 듯한 엘프 마법사를 달고.
"금수저! 괜찮아?!"
"..."
왕세자는 대답도 하기 싫다는 듯 코웃음 쳤다. 마리안은 엘테르의 뒤를 따라온 엘프 마법사를 알아보고는 그들 식의 인사를 건넸다.
"그위오니드 원로원의 의원 벨리온."
"두 왕관의 세자비 마리안 노르예트."
마법사가 답했다. 관등성명에, 간단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딱딱한 인사법. 엘프들은 웬만해서는 그 이상의 예를 잘 차리지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힘겹게 인사를 따라 하려던 왕세자를 가나와 엘테르가 붙들어 자리에 도로 앉히자 마리안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지만, 반갑습니다. 무슨 연유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움찔하는 마리안.
엘테르가 그런 마리안을 의아한 눈으로 보는 동안, 의원 벨리온이라 불린 마법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모두 앉지'라며 명령조로 한 마디 건네고 팔짱을 꼈다. 초면인데, 그중에는 일국의 세자비와 왕세자도 끼어 있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그 행동에 모두는 홀리기라도 한 듯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두가 벨리온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한참 동안 차가운 눈으로 마리안을 쏘아 볼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마리안의 미소 띤 얼굴도 점차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요리사는 메뉴판을 들고 왔다가 갑자기 군법 회의가 된 듯한 자리의 분위기를 의아해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돌아갔다.
'아니, 뭐라도 말해 달라고요! 도움!'
마리안이 속으로 외치는데, 옆에서 엘테르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저기, 그만 용건 이야기 좀 하지? 우리 세자비에게 볼 일 있다며?"
그제서야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본인, 아니 엘프들도 저승에 데려가 다오."
그 말에 마리안이 돌아보자, 엘테르는 황급히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벨리온은 말을 이었다.
"그쪽이 아냐. 요리사에게 들었다. 주점 급사가 보이지 않길래 물었지. '저승에 갈 방법을 찾으러 세자비에게 갔다.'라고 말하고는 '비밀이다.'라며 입을 다물더군. 거기 페레에게는 세자비의 위치를 물었을 뿐이지."
...요리사 님. 핵심을 콕 집어 놓고는 '비밀이다.' 라고 덧붙이는 건 비밀을 지키는 게 아니라고요. 요리사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라고 부탁하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고 알려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리안은 이유를 물었다. 벨리온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되물었다.
"대답하기 전에, 우리가 전사의 길에 일생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역사에 의하면 엘프들이 처음부터 이런 종족은 아니었다. 원래는 섬세하고, 감수성 풍부하고, 삶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누군가를 해치는 걸 극도로 꺼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상신들과의 교감을 통해 지혜를 얻었고, 때문에 누구보다도 저승과 연이 깊은 종족이었다.
그러나 원대륙의 멸망 때 그 모든 것은 독이 되었다. 저승을 통해 원대륙을 탈출하는 동안, 사람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죽음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엘프들은 특유의 교감 능력 때문에 그들의 왕이 살해당하며 느낀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 충격은 가히 '영혼이 살해당했다.'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죽음의 고통. 고향이 파괴된 슬픔. 파괴신에 대한 증오. 그리고 복수심.
때문에 그들은 복수하기 위해 종족 전체가 전사의 길을 걸었고, 복수심을 채찍질하기 위해 그위오니드의 가시덤불과 폐허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으며,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새로운 왕도 뽑지 않았다.
"...복수하기 위해서인가요? 파괴신의 군대에게."
마리안의 말에 벨리온은 고개를 저으려다, 살짝 끄덕여 보였다.
"그도 맞지. 하지만 조금 다르다. 복수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은 미래를 망칠 뿐이라는 데 - 현왕 에노이르와 뜻을 같이 하고 있으니."
"그럼 왜..."
"묻고 싶은 거다. 선왕 아란제브께.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지를."
찻잔을 잡은 벨리온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우린 이미 천년도 넘게 방황해 왔다. 스스로에게 짓눌려 멸족의 위기를 겪기도 했지. 복수를 위한 무리한 작전을 강행하다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뻔한 적도 있다. 그나마 바깥세상을 잘 아는 에노이르가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었지만, 그의 방식. 그의 방식은 너무... 너무나도..."
'... 부끄러워!'
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웠는지,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리는 벨리온.
"괜찮으신가요? 위어드윈드 가문과의 협약은?"
위어드윈드는 마리안의 노르예트 가문와 경쟁중인 가문이었다. 노르예트 가문이 황금 혀 항구를 중심으로 제해권을, 트리스테 가문이 마리아노플을 중심으로 상권을 쥐었다면, 위어드윈드는 황금 평원의 곡창지대에서 창출된 부를 바탕으로 비행선을 이용한 제공권에 투자했다. 원대륙의 환경이 바뀌어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자, 서둘러 조상들의 땅을 수복하고 싶어 했던 엘프들은 위어드윈드의 비행선을 이용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병력을 지원하기로 협약했었다.
벨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끝나간다. 병력으로서 지원을 약속한 동족들은 이미 대부분 건너가 있고, 급한 왕래 정도는 전송망을 이용하면 되지.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아니, 저희 가문과의 접촉이 정치적으로 괜찮겠냐는 뜻인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이참에 노르예트 가문도 엘프들과 접점을 맺는 게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되삼 켰다. 어쨌거나 그들은 대륙 최고의 전사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저승길 원정대...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군요. 저승 원정대에 엘프들도 편성할 수 있을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나도!"
엘테르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갈 거야, 저승."
"네?"
"... 어, 안돼?"
"안되진 않지만... 왜요?"
"어 음.... 별거 아냐. 잠깐이면 돼, 헤헤. 확인해 볼 게 있어.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이 음흉하게 웃는 엘테르. 자신을 돌아보는 마리안에게 가나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을 뿐이었다.
"뭐, 적당히 입막음하려면 옆에 두는 게 낫겠지?"
"알았어요. 사고만 치지 말아요."
"언제 가능한가?"
벨리온은 엘프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모르겠어요. 저승을 상처 입히지 않고 가는 방법은 이제 연구를 시작했을 뿐이고, 상황에 대한 정보도 부족해요."
"연구라면 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저승의 상황에 대한 정보 수집이라면... '하얀 숲'에 다시 가 봐야 하는 건가."
하얀 숲은 저승의 문이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하얀 숲에 가신 적이 있어요?"
"한 번. 그곳을 지키는 수호자들에게 폐를 끼쳤지. 그러는 세자비는?"
"저랑 여기 가나 너츠는 가 본 적이 있어요. 음... 의원님께서 수호자들과 만나는 게 꺼려지신다면, 그쪽으로는 저희 둘이 가 보면 될 것 같군요."
"좋아. 그 외에는... 역시 '루키우스'를 찾아야 하나."
벨리온의 중얼거림에 마리안은 놀랐다.
루키우스 - 저승의 여신 누이의 배필.
그는 원대륙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전 사람이었다. 루키우스는 누이 여신이 신성을 얻기 전부터 그녀의 연인이었고, 그녀와 함께 파괴신에 맞서 싸웠다. 원대륙에 건너오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여신을 묻어 저승으로 돌려보낸 것도 그라고 했다.
마리안은 책을 통해 누이 여신과 루키우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들을 접했고, 동경심을 가졌다. 루키우스가 그 와중에 영생을 얻었다는 것도 알게 되자 집요하게 그의 흔적을 추적했고, 마침내 그와 대면할 수 있었다. 마리안과 동행하던 가나 역시.
가나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루키우스가 살아 있다는걸."
"아니. 하지만 소문이 있더군. 그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혹시 세자비도 그러한가?"
벨리온이 자신을 돌아보자 마리안은 고심 끝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
"잘 됐군!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도 아는가?"
"... 마지막으로 뵌 건 작년 이니스 섬의 누이 여신 제례에서였어요. 나무 그늘에서 제례를 지켜보고 계시길래, '루키우스님!' 하고 불렀는데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표정을 지으셨죠. 그러고는 돌아서서 숲속으로 가시기에 쫓아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 기억술사들의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군. 그분이 원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만날 수 없단 말이지?"
"네. 하지만..."
"?"
마리안은 식탁을 꽉 움켜잡았다.
"루키우스님은 여신님과 관련된 일을 모른체하실 분이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마지막으로 만나 뵈었을 때는 그랬고요. 그러니 이번에도 뵐 수 있을지도 몰라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좌중을 둘러보는데, 왕세자와 엘테르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대...."
엘테르는 쩍 벌린 입 그대로 탄성을 질렀다.
"대애애애애애박! 야, 들었어 금수저? 루키우스래! 와아아? 루키우스! 바람의 신 타양의 친우?! 아니 어디선가 봤다고는 들었지만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라고? 심지어 만났어? 우리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나 원대륙까지 가서 샅샅이 뒤져봤지만 루키우스 꼬리도 못 봤는데. 진짜야, 세자비? 어? 말 좀 해봐. 어떻게 생겼어? 근엄해? 잘생겼어? 아닌가 원래 연예인이었다고 하니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을라나, 응응응?"
흥분해서 자기 등을 정신없이 두들기는 엘테르 때문에, 왕세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쿨럭쿨럭! 그만해 이 테미캣아! 어, 음. 세자비 마마. 그러니까 금시초문이군요. 그런데 왜 그리 자신을 숨기십니까? 사실이라면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분인데."
"그분은..."
마리안은 쓰게 웃었다.
"그분은 세상사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세요. 누이 여신의 유언 때문이죠. '아버지로서, 자손들을 지켜봐 달라.'라는."
루키우스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관여한 사건에 대한 기록은 원대륙으로부터의 탈출로부터 십여 년도 되지 않아 끝나 있었다. 엘프들이 가장 먼저 북쪽으로 떠날 때도, 드워프들이 광맥을 찾아 서쪽으로 떠날 때도, 누이 여신을 기리고자 자신들을 누이안이라 칭한 종족이 솔즈리드 반도에 초승달 왕좌를 건설할 때도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물며 동대륙으로 다시 한번 이주하여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했던 왕세자의 종족 - '하리하란' 나, 원대륙 멸망 이전에도 동대륙에 상당수가 살고 있던 페레들에게는 더더욱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런 일을 묵과하실 분은 아니에요. 그러니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그래서..."
마리안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의원 벨리온 님. 노르예트의 저택에서 저승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며 들어가는 방법을 연구 중인 미카엘라 융에라는 아이를 도와주세요. 가나 너츠? 넌 나랑 내일 하얀 숲에 가서 저승 문의 수호자들을 만나자."
"저승의 돌을 써서 말이지?"
"그래. 가까운 마을에 전송망이 있으니 하루면 다녀올 수 있을 거야. 왕세자님과 엘테르?"
세트처럼 불린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니스 섬에서 루키우스님의 행적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섬엔 전송망이 없어요. 그래서 모두 함께 움직이는 건 시간 낭비가 될 듯하니, 우선 두 분이 가까운 마을에서 바다를 건너 이니스섬에 다녀와 주시겠어요? 그 섬의 신관들에게 보낼 편지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엘테르와 왕세자는 잠시 눈빛을 교환한 다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벨리온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두 왕관의 세자비는, 지휘관의 자질이 있군."
가나 너츠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게. 사람 부리는 거 여전히 잘 한다니까?"
'사람을 잘 부려? 내가?'
마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